현대패션의 로맨틱 이미지에 관한 연구 Print ISSN 1229-6880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Costume Online ISSN 2287-7827 Vol. 64, No. 4 (June 2014) pp. 52-75 http://dx.doi.org/10.7233/jksc.2014.64.4.052 20세기 중·후반 한국패션 고찰 - 제1세대 한국 패션디자이너 노라노(노명자)를 중심으로 - 박 신 미 국립안동대학교 의류학과 조교수 An�Observation�on�Mid�to�Late�Twentieth�Century�Korean�Fashion -� Focus� on� First� Generation� Korean�Fashion� Designer,� Nora�Noh� - Shinmi� Park Assistant Professor, Department of Clothing & Textiles, Andong National University (투고일: 2014. 1. 23, 심사(수정)일: 2014. 4. 9, 게재확정일: 2014. 4. 14) ABSTRACT1) The purpose of this research is to classify the historical features of mid-to-late twentieth cen- tury Korean fashion with a focus on ‘Nora Noh’, who is a first generation Korean fashion designer. The specific questions of this research are as follows: how did mid-to-late twentieth cen- tury Korean fashion and the Nora Noh brand develop and what i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What are the important features of Korean women’s fashion design in the mid-to-late twen- tieth century? What are the characteristics exhibited in each decade in Korean women’s fashion and Nora Noh's fashion? This paper conducted the research by focusing on the Korean fashion development as a background of simplification in the way of dressing and specific historical incident. Researchers deployed a qualitative research method providing a systematic review of the previous studies by analyzing content as well as eleven oral statement interviews and the case study of Nora Noh. The result shows that Nora Noh is one of the first generation of Korean fashion designers who led fashion trend and system in Korea. The designer also influenced Korean commercial fashion in the 1970s and American fashion trends in the 1980s. Key words: Nora Noh(노라노), the first generation Korean fashion designer(제1세대 한국패션디자이너), the mid to late twentieth century Korean fashion(20세기 중 후반 한국 패션) Corresponding author: Shinmi Park, e-mail: fashion@anu.ac.kr 20세기 중·후반 한국패션 고찰  - 53 - Ⅰ. 서론 1. 선행연구 분석 및 연구 의의 20세기 한국패션사 연구는 복식미학이나 서양 패 션디자이너 분석 위주로 진행된 서양복식사부문과 유물 발굴, 사료 분석을 근거로 한 전통복식고증이나 재현 중심의 한국복식사 연구부문 모두에서 주목받 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 이유는 20세기 한국패션 사 연구가 한국패션사이나 본질적 형식은 서양의복 을 근간(根幹)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88년 유수경이 ‘韓國女性洋裝의 變遷에 관 한 硏究’1)이라는 주제로 박사학위논문을 발표하면서 전통복식연구영역에서 벗어난 한국 근대복식사가 연 구되기 시작했다. 이에 개화기이후 한국복식은 일본 과 미국의 영향이 지대했음이 밝혀졌고, 후속 연구로 시기에 따라 일본의 영향을 받은 내용을 중심으로 분석된 연구2)3)4)5)6)와 미국의 영향을 받은 내용을 고찰한 연구7)가 발표되었다. 또한 뉴밀레니엄에 접 어들면서 20세기 한국패션을 다룬 단행본들이 출간 되었다. 고부자의 우리생활100년 · 옷(2001)8)은 전 통복식전공자의 관점에서 20세기 한국패션을 서술하 고 있고, 신혜순의 한국패션100년(2008)9)은 한국 현대의상박물관의 소장 작품을 정리한 도판서로 사 적흐름과 역사적 분석은 배제되어있다. ‘현대패션100 년편찬위원회’의 현대패션1900-2000(2002)10)과 이 재정, 박신미의 패션, 문화를 말하다(2011)11)는 20 세기 서양복식을 다루면서 한국패션사의 변천을 문 화적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으나 한국 근현대 패션사 의 연구는 여전히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현 실이다. 한국패션 근현대사가 왜곡 없이 연구되기 위해서 는 20세기 패션과 관련된 사회 · 문화적 사건의 중심 에 서 있었던 한국 패션디자이너들의 연구가 필수적 이지만 사료적 가치가 있는 제1세대 패션디자이너의 연구는 ‘최경자’의 연구가 2차례12)13)진행되었고, ‘노 라노’의 경우는 디자이너의 신문기고문14)15)과 자서 전16) 그리고 2012년 개최된 디자이너의 60년 회고전 시인 ≪La Via en Rose展≫17)을 계기로 TV18), 신 문 및 잡지인터뷰19), 다큐멘터리 영화20) 자료가 확 보되었고, 2012년 전시자료를 정리한 논문21)이 발표 된 상태이다. 하지만 이 자료들은 디자이너의 성공담 과 에피소드위주로 동일한 내용이 반복적으로 기록 되거나 이를 수합한 것으로 사적 고찰에 필요한 중 요자료들의 근거추출이 부재하여 개인의 기록물은 될 수 있으나 한국 근현대사의 사료적 가치를 부여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 ‘노라노(본명, 노명자)’는 미국유학파 제1세대 패션 디자이너로 1949년부터 현재(2014)까지 활동하고 있 는 한국 근현대 패션사의 살아있는 증인이다. 노라노 는 한국패션 현대화의 전환점인 1950년대부터 1970년 대까지 여성패션의 틀을 구축한 제1세대 디자이너 최 경자, 서수연과 함께 일제강점기이후 한국패션사 연 구를 위한 핵심 인물이다. 한국패션현장을 지켜온 제 1세대 디자이너들에 관한 연구는 자료가 불충분한 194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패션의 실증적 데이터베이스(DB) 구축이라는 측면에서 조속히 이루 어져야한다. 하지만 제1세대 패션디자이너 중 ‘최경자’ 는 이미 2010년 작고했고, 독일에 거주하고 있는 ‘서 수연’은 치매를 앓고 있어 연구에 어려움이 있다. 그 러므로 노라노의 연구를 통해 제1세대 디자이너의 소 장 자료를 사료화하고 패션사의 주요사건을 밝혀내는 것은 20세기 중 · 후반 한국패션사 연구의 근간을 마 련할 수 있는 계기이다. 또한 수집된 자료들의 분석 결과는 앞으로 진행될 한국 근현대패션사 부문 후속 연구의 초석이 될 것이라는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 2. 연구목적 및 방법론 본 연구의 목적은 제1세대 한국 패션디자이너 노 라노의 활동과 선행연구를 분석하여 20세기 중․후 반 한국패션의 발전과정을 고찰하는데 있다. 본 연구 는 연구대상자의 삶을 개인의 성공담으로 조명한 기 존 기록물들과 다르게 자료를 사적근거에 의해 분석 한다. 연구목적달성을 위한 연구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1940년대~1990년대 한국패션과 패션디자이 너 브랜드 노라노의 발전과정은 어떠한 관계가 있는 가? 이 시기 패션디자이너를 위한 정부의 지원은 어 服飾 第64卷 4號  - 54 - 떤 것들이 있었으며 이러한 지원은 디자이너들의 해 외시장진출에 도움이 되었는가? 둘째, 한국패션의 현대화 전환점인 1950년대부터 디자이너컬렉션 시스템이 구축된 1990년대까지의 한 국패션의 환경과 노라노의 활동은 어떠했는가? 또한 이를 통해 추출된 한국패션사적 사건들은 무엇이며 이것이 20세기 한국패션사에 기여한 점은 무엇인가? 본 연구는 앞서 언급된 연구문제 해결을 위해 노 라노의 패션계입문과정을 통해 1940년대 패션계의 환경을 살펴보고, 1949년 양장점 오픈, 6.25전쟁 직후 패션쇼 개최와 프랑스 연수 이후 ‘패션디자이너 시대’ 를 연 계기 그리고 무대의상제작을 통한 문화계인사 들과의 교류를 고찰하여 한국 근현대패션사의 주요 사건들을 추출하고 한국패션사에 디자이너가 기여한 점을 밝혀낼 것이다. 더불어 1963년 기성복시대 선언 이후 노라노의 1970년대~1990년대 해외수출 수주과 정을 통해 패션산업육성을 위한 정부와 민간단체의 지원과 노력 그리고 한국패션의 발전과정을 고찰할 것이다. 본고는 문헌연구와 내용분석, 사례연구를 연구방 법으로 채택하였으며 추가자료 확보와 검증을 위해 디자이너 노라노와의 실증면담연구를 병행하여 연구 대상자의 개인자료와 연구자 수집 자료를 사료화 할 것이다. 본 연구는 2011년 09월 시작되었으며 2012년 05월 초벌자료 분석을 끝냈고 같은 해 06월부터 국 립예술자료원의 ‘한국 근현대사 구술채록사업’의 책 임연구자로 3차례(2012. 07.10: 08.02: 08.16)의 예비 면담, 5차례의 본 채록면담(2012. 08.29: 09.05: 09. 12: 09.19: 09.26), 3차례의 추가 채록면담(2012. 12. 12: 12.22: 12.26)을 연구대상자 노라노와 진행하였 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2013년 3차례의 연구면담 (2013. 05.26: 06.22: 08.23)22)을 실시하여 연구대상 자 소장 자료와 연구자 수집 자료를 분석하여 한국 근현대패션사적 사건들을 추출하였다. 매회차별 예비 면담은 1회 2시간, 본 채록면담은 5시간, 추가 채록 면담은 2시간, 연구면담은 3시간을 기준으로 진행되 었다. 면담자료는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출처와 근 거자료가 명확히 밝혀진 내용만을 연구 분석대상에 포함시켰고 연구대상자 개인의 의견이 반영된 불분 명한 내용들은 분석대상 자료에서 제외시켰다. 또한 본고는 이미 추출된 기존자료들에서 나타난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본 연구는 노라노가 한국패션계 동료들과의 교류 가 활발하지 않은 관계로 20세기 중․후반 한국 패 션계 전반적인 흐름을 대상 디자이너 연구만으로는 고찰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음을 밝혀두며, 연구자 는 추후 20세기 한국 근현대 패션사 연구의 객관적 검증 결과도출을 위해 최경자, 서수연 등의 ‘제1세대 디자이너들의 행적사 연구’, ‘20세기 한국패션디자이 너 연구’ 그리고 ‘상업브랜드들의 발전과정 연구’를 후속연구로 진행할 것이다. Ⅱ. 20세기 중․후반 한국패션 본 절에서는 20세기 중․후반 한국패션현황과 노 라노패션의 브랜드 성장과정을 10년 단위로 고찰하 며, 디자이너 심층연구를 통한 한국패션사적 사건 추 출은 제III장에서 논의하기로 한다. 본 연구는 20세기 중․후반 한국패션사적 사건을 추출하는 것이 목표 이므로 선행연구들에서 이미 분석된 각각의 연대별 시대적배경과 패션사와 관련 없는 정치․문화적 사 건들은 논의하지 않는다. 1. 20세기 중 · 후반 한국 패션 현황 1) 1940년대 1940년대는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났으나 그동안 일 제의 약탈결과로 의생활이 궁핍했던 ‘의복문화정체기’ 이다. 일제강점기에 몸뻬와 앗빠빠23)가 국민복으로 강요 되었고 해방 후 애국심 재결집의 수단으로 한복착용 이 장려되었으나 빈곤했던 당시의 물자수급 상황과 실용성을 중시한 대중들은 저고리 혹은 구제품 블라 우스에 몸뻬24)를 일상복으로 착용하였다. 해방 후 남성복의 패권을 거머쥔 국내 양복점들의 기술향상을 필두로 남성복지의 수요창출로 섬유산업 발전이 시작되었고 여성복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양 장점이 확산되었다. 1922년 유학파디자이너 이정희에 20세기 중·후반 한국패션 고찰  - 55 - 이어 1937년 여성복 전문 양장점 '은좌옥'을 연 최경 자가 디자이너로 이 시기 활동하였다.25) 시대의 트렌 드를 수용한 최경자는 1949년 튜닉톱과 타이트스커 트 착장의 밀리터리 룩을26) 디자인했다. 대중의 스타 일과 고위층(맞춤복)의 스타일이 명확히 구분된 이 시기의 패션트렌드는 맞춤전문 양복점이 주도했으며 일제강점기 양복점이 많았던 종로와 충무로가 여전 히 패션중심지로 그 명맥을 이어갔다. 일제강점기에 스타일을 주도했던 경기, 이화, 숙명 등 여학교들을 중심으로 교복제청움직임이 일어났 고27) 해방 후 제1차 구제품이 유입되어 ‘배급품 스템 프제도’와 ‘밀수방지정책’이 실시되었다. 구제품의 영 향으로 군복스타일과 스타킹, 구두 등 서양의복 소품 이 확산되었고 낙하산지로 만든 코트와 머플러 그리 고 밀수품이었던 마카오복지와 빌로드(velvet)가 유 행하였다.28) 부산에는 71개의 신발공장이 등록되었 다.29) 일제의 부산물이었던 몸뻬가 계속 착용되자 1949년 신생활장려위원회에서 '간단복'을 제정하여 대중의 의복생활변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2) 1950년대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대는 1940년대와 같은 의생활 빈곤기였으나 전쟁으로 더욱 궁핍해진 사회 는 서구의 의생활 문화를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환 경을 조성하며 이 시기를 ‘서구식 의복문화확산기’로 만들었다. 1952년 '전시생활개선령'의 시행으로 의복과 사치 품이 규제되었으나 부산광복동을 중심으로 이미 미 군과 연합군을 통해 유입된 구제품과 수입품 전문시 장이 출현했고 이는 전쟁 이후 남대문과 동대문 상 권형성으로 이어졌다. 전쟁이후 제2차 구제품 유입이 해방 후 제1차 구 제품유입과 달랐던 점은 검열 없이 다양한 아이템을 확산시켰다는 것이다. 1940년대 스타일의 몸뻬와 한 복이 혼용된 가운데 구제품을 염색해 리폼한 코트, 스웨터, UN점퍼, 낙하산지 블라우스와 밀리터리 스 타일이 트렌드를 주도했고30) 청계천을 중심으로 염 색공장들이 생겨났다. 1952년 <제1회 신사복 패션쇼>가 열렸고31) 1955년 에는 ‘신생활복착용법안'이 통과되어 양장보편화에32) 힘을 더했고 1957년에는 최초의 디자이너 연합회인 ‘대한복식연우회'가 창설되었다.33) 최경자, 노라노, 서 수정, 서수연, 김경애, 석주선 등이 공인된 패션디자 이너로 활동했고, 후반기에는 송옥, 엘리제, 미성양복 점(임복순), 한양장점 등의 양장점이 명동에 매장을 열면서34) 명동이 패션의 메카로 급부상하였다. 이들 중 최경자와 노라노는 전쟁 중에도 대구와 부산에서 활동하였다. 최경자는 1954년 ‘최경자복식연구소’를 세워 복식디자인교육의 기반을 다졌고 노라노는 1956년 서구식시스템을 갖춘 최초의 디자이너패션쇼 를 열어 파리(Paris)의 트렌드를 국내에 소개하였다. 또한 ‘대한복식연우회’의 서수연, 김경애, 석주선, 한 희도 등은 일본 양장계 시찰을35) 통해 선진시스템을 받아들여 양장점 형식을 탈피한 디자이너 패션의 시 대를 여는데 일조하였다. 미성양복점의 임복순은 이 승만대통령의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를 위해, 한양 장점은 윤보선대통령의 영부인 공귀덕 여사를 위해 우리원단으로 슈트를 디자인하였다.36) 여성패션의 확 산을 증명하듯 <여원>, <여성계>, <주부생활> 등 12 개 여성잡지가 창간37)되었고 패션트렌드가 남성복중 심에서 여성복중심으로 이동하였다. 제일모직이 우리 기술로 모직을 생산하고 나일론의 국내생산 수급이 가능해진 시기도 1950년대이었다. 3) 1960년대 1960년대는 한복의 의례복화와 양장의 보편화가 정착된 ‘서양복식정착기’로 섬유산업이 국가기간산업 으로 선정되어 패션산업에 정부의 지원이 시작된 시 기이다. 1961년에는 ‘대한디자이너복식협회'가 결성되었고 같은 해 ‘재건 국민복 콘테스트'가 개최되었다. 1962 년 5.16 군사 쿠데타 1주년을 기념하는 문화행사로 정부의 지원 아래 해외디자이너 초청 컬렉션이 열려 미국,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중국, 일본, 필리 핀 등 15개국이 행사에 참석했으며 피에르 카르뎅과 일본 디자이너 하라누부코 등이 방한하여38) 세계 패 션트렌드를 소개하였다. 이 컬렉션에서 디자이너 최 경자는 ‘청자드레스'를 발표해 주목받았다. 반면 노라 服飾 第64卷 4號  - 56 - 노는 1963년 최초의 디자이너 기성복컬렉션을 개최 하며 다가올 기성복시대를 준비하였다. 간편복이 정착되었고 유복한 부인들의 한복을 대 신할 홈드레스가 등장했으며 영화, 드라마, 음악 등 미디어의 영향으로 슬리브리스, 양단드레스, 리버서 블코트, 핫팬츠, 미니스커트 등 해외 패션스타일이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다. 부풀린 헤어, 7~8부의 블 라우스, 미니스커트, 중간 굽의 뽀족한 펌프스착장이 유행했으며39), 1960년대 말에는 판탈롱 팬츠가 출현 하였다. 합성섬유와 프린트기술의 발달과 옵아트, 팝 아트의 영향으로 폴리에스테르와 저지에 프린트된 강렬한 색상의 패턴원단이 생산되었다. 청년문화의 확산으로 서구패션스타일이 급속히 전파되자 전통의 현대적 재해석을 필두로 개량한복이 장려되었으나 주류스타일에서는 배제되었다. 1950년대에 이미 이름 을 올린 디자이너들이 왕성하게 활동한 가운데 김순 희(제일편물), 배천범(석경의상실), 박윤정(미스박 테일러), 이용열(뱅탕), 앙드레김, 조세핀조가 주목받 았고 이들 중 배천범은 1965년 앙드레 쿠레쥬의 영 향을 받아 <메탈릭 미니드레스>를 달나라여행 컬렉 션에서 발표했고, 1962년 마드모아젤 김경희의 디자 이너에서 독립한 앙드레김은 1966년 파리에서 패션 쇼를 개최하였다. 또한 박윤정은 비대칭 클로징 톱과 플리츠 미니스커트를 1968년 ‘의상계’에 소개하며 표 지모델이었던 윤복희40)의 무대의상을 제작한 노라노 와 함께 패션계에 불어 닥친 미니열풍을 주도하였다. 4) 1970년대 1970년대는 상업브랜드와 함께 디자이너 기성복이 보편화된 ‘기성복패션시스템확립기’로 디자이너 기성 복브랜드와 상업 패션브랜드시장이 분리된 시기이다. 대기업들이 내어 놓은 상업기성복브랜드의 출현은 실로 위협적인 것이었다.41) 레나온, 논노, 반도패션, 경방, 모라도, 라보테, 벨라, 버킹검, 맥그리거, 톰보이 등이 이 시기 론칭했으며, “73년 전체 인구의 40%가 이미 기성복을 구입했다”42)는 통계가 있다. 1975년 신세계백화점은 <노라노 코너>를 입점 시켰고, 미도 파백화점은 신진 디자이너 코너인 <패션 스트리트> 를 열어 진태옥, 이신우, 트로아조, 박항치, 한혜자, ‘Mrs.고’, 오은환 등의 고급 기성복 제품을 진열하며 디자이너 브랜드 시대를 여는데 앞장섰다.43) 또한 디 자이너들의 해외진출이 시작되었으며 섬유산업의 발 달로 동대문원단시장이 확장되었다. 1972년 유신정국으로 인해 패션관련 TV방영과 호 텔패션쇼 금지령이44), 1973년에는 장발단속이 전국적 으로 시행되었지만 이러한 규제가 20대를 주축으로 한 청년문화의 확산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세계의 트 렌드였던 펑크는 문화적 이질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수용된 반면 히피스타일이 트렌드를 주 도하며 프린트 패턴과 레이어드가 유행하였다. 청년 패션 트렌드의 중심에는 팝과 록 가수들이 있었으며 장발, 판탈롱, 핫팬츠, 미니스커트, 넓은 벨트, 빅 숄 더 백, 통굽 등의 펑크와 히피의 요소들이 믹스 앤 매치된 캐주얼이 유행하였다. 레이어드에 용이한 니 트웨어와 다양한 길이의 스커트가 선보였으며 청바 지가 보편화된 것도 이 시기이다. 또한 가정주부들 사이에 홈웨어가 유행하면서 홈웨어를 전문으로 생 산한 ‘신즈 부띡크’가 인기를 끌었다.45) 합성섬유와 천연섬유가 혼재한 가운데 1979년 탄성섬유인 스판 텍스의 개발로 스포츠웨어 시장이 확산되기 시작하 였다. 5) 1980년대 1980년대는 국내시장의 세분화와 함께 해외라이센 스브랜드가 유입된 ‘패션산업성장기’이다. 1983년 교복자율화로 중저가 영캐쥬얼 시장이 급 성장했고 '제1회 대한민국섬유디자인경진대회'개최되 어 정부차원의 신진디자이너 육성사업이 시작되었다. 또한 1985년에는 디자이너들이 파리 여성 프레타 포 르테 박람회인 ‘살롱 드 프레타포르테 페미닌(Salon de prét-á-porter feminine)’에 참가하여 경쟁력을 길 렀다.46) 1989년에는 SFFA(Seoul Fashion Artistes Association)가 결성되어 한국패션컬렉션의 기틀이 마련되었고 같은 해 해외여행자율화 규제가 풀리자 트렌드의 직접 유입환경이 조성되었다. 패션디자이너브랜드의 행보가 활발해지며 여성복 에서 커리어우먼 패션의 시대가 열렸고 남성복 디자 이너 브랜드가 생겨났다. 설윤형이 한국의 전통을 모 20세기 중·후반 한국패션 고찰  - 57 - 티브로 디자인을 전개한 가운데 루비나는 히피의 감 성을 컬렉션에 담아냈고 이외에도 김동순, 김창숙, 박윤수, 손정완, 이상봉, 홍미화가 여성복을 장광효 (카루소)가 남성복의 트렌드를 주도하였다.47) 또한 이 시기 캐주얼과 남성복을 중심으로 해외라이선스 브랜드가 급성장해 국내 패션시장의 투자패턴이 변 화하였다. 또한 이미 포화된 여성복을 대체할 시장으 로 타깃을 10년 낮춘 20대를 위한 캐릭터 캐주얼과 교복을 대체할 새로운 의상이 필요했던 10대 청소년 을 위한 영 캐주얼 시장이 액티브스포츠웨어와 함께 급성장하였다. 1980년대 초 나산, 신원, 성도 그리고 중반이후 대현, 대하, 한섬, 데코의 클래식브랜드와 1989년 비비드 컬러를 부각시킨 쌍방울의 기비, 성도 의 퍼즐, 동일레나운의 미끄마끄 등의 캐릭터 여성복 이 시장을 주도했고 영 패션시장을 선점한 이랜드는 브렌따노, 언더우드, 헌트를 론칭하며 사업규모를 키 워나갔다. 가죽제품과 청바지의 유행으로 뱅뱅, 에드 윈 등의 국내 진 브랜드와 게스, 리, 리바이스, 조다 쉬, 서지오바렌테 등 라이센스 브랜드가 데님시장에 서 경쟁하였다. 디자인에서는 컬러감이 중요해졌고 비비드(vivid) 와 뉴트럴(neutral) 계열 모두가 유행하였다.48) 모피 와 인조모피 트리밍, 패딩아이템, 패치워크, 빅 실루 엣, 파워슈트 등 과시적인 스타일, 상의를 강조한 빅 재킷에 미니스커트, 블루종에 레깅스 혹은 스키니 팬 츠착장, 하의를 강조한 디스코팬츠 그리고 레이어드 와 유니섹스스타일이 1980년대 트렌드의 중심에 있 었다. 6) 1990년대 1990년대는 해외브랜드의 직접유입과 유통구조 변 화로 인해 시장이 급변한 ‘패션시장급변기’이다. 1991년 스파(SFFA)의 패션 컬렉션 시작으로 해 외컬렉션시스템을 갖춘 디자이너패션의 시대가 개막 했고 1992년에는 신진디자이너를 중심으로 뉴웨이브 인 서울(New Weave in Seoul)이 조직되어 컬렉션체 제가 이분화 되었다. 1992년 이신우와 이영희, 1993 년 진태옥, 1995년 홍미화, 1999년 문영희가 파리 프 레타 포르테 컬렉션49)에 1998년 설윤형, 한혜자, 김 동순, 지춘희, 박윤수가 뉴욕컬렉션에 진출하며 한국 패션을 세계에 알렸고, 김영주, 노승연, 문영희, 박윤 정, 박춘무, 송지오, 신장경, 우영미, 이영희. 임선옥, 지춘희, 최연옥이 활동하였다. IMF이전 상업패션시 장이 전성기를 누린 가운데 데코, 아나카프리, 타임, 마인은 고가의 정책을 내세워 클래식 스타일에 집중 했고, 샤틀렌, 미샤, 베스티벨리 등은 명확한 타깃의 스타들을 광고에 기용해 대중을 공략하였다. 또한 마 니아계층을 위한 오브제와 텔레크레프 등이 주목 받 았고 다수의 중저가 캐쥬얼 브랜드가 론칭 해 1990 년대 초․중반이 한국 상업 패션의 전성기임을 입증 하였다. 1995년 재정경제원의 ‘수입개장정책'발표로 해외패 션브랜드의 직영 진출이 가능해지자 수입브랜드와 함께 남대문과 압구정동에 해외브랜드 편집매장이 늘어났고 이들은 새로운 스타일의 주도세력이 되었 다. 유통시장의 변화로 패션아울렛이 등장했고 이마 트, 까르프, 테스코와 같은 대영할인매장이 문을 열 어 중․저가 PB(Privet Brand)상표가 생겨났다. 1997년 IMF로 인한 의류회사 도산과 디자이너브랜 드의 부도로 패션시장성장이 둔화되자 일부 디자이 너들이 유통업체와 협업을 통해 PB패션시장에 진출 하였다. 1990년대 말에는 원단시장이 밀집한 동대문 에 두타, 밀리오레 등 새로운 형식의 패션상권이 형 성되었고 <보그>, <바자> 등 해외라이선스 잡지의 국 내 론칭으로 트렌드전파가 가속화되었다. 개인의 스타일이 중요해진 이 시기는 X세대, N세 대, 오렌지족, 힙합족, 명품족, 미시족 등 특정 소수 계층의 스타일이 주목받았고 10대 가수들이 영 패션 리더로 급부상해 기성세대의 클래식라인과 10대의 패션을 명확히 구분하였다. 서태지의 힙합패션, 노출 이 심한 배꼽 티셔츠, 찢어진 청바지, 무스탕이 1990 년대의 유행아이템이었다. 2. 1940~1990년대 노라노패션 성장과정 노라노패션 주요연혁 분석결과 1940년대는 ‘패션 입문기’, 1950년대는 ‘브랜드정착기’, 1960년대는 ‘사업 확장기’, 1970년대는 ‘해외시장진출준비기’, 1980년대 는 ‘해외시장개척기’ 그리고 1990년대는 ‘사업축소기’ 服飾 第64卷 4號  - 58 - <표 1> 1940~1990년대 노라노 브랜드 성장과정54) 활동시기별 특징 성장과정 1940년대: 패션입문기 1949 Taback of California 보조디자이너, USA. 1949 신당동 의상실 노라노 양장점 개업. 1950년대: 브랜드정착기 1950-52 6.25 전쟁 중 부산 광복동 양장점 활동. 1952 서울 중구 퇴계로 노라노의 집 개업. 1953 종로로 매장이전. 1955 명동으로 매장이전. 1960년대: 사업확장기 1963 명동사옥마련 및 미우만 백화점에 디자이너 최초로 기성복 코너 설치. 1965-66 Hawaii Honolulu에 기성복라인 쇼룸 개업. 1967 여대생을 위한 신촌지점 개점, 본 매장 대비 10% 할인 판매. 1970년대: 해외시장진출준비기 1975 신세계백화점에 노라노 기성복 코너 입점. 1977 ㈜예림양행 설립. 1978 New York 7th Ave. 쇼룸 개업. 1979 Nora Noh Inc., New York 미국현지법인 설립. 1980년대: 해외시장개척기 1980 New York, Macy's백화점 15개 쇼룸 노라노 제품으로 디스플레이. 1982 안산반월공단에 프린트 공장 설립 및 Sacks Fifth Ave.백화점 입점. 1983 Nora Noh West 론칭 및 New York, Nordstrom 백화점 입점. 1984 미국판 VOGUE에 광고 게재. 1986 미국판 Harper's Bazaar에 광고 게재. 1989 명동에서 청담동으로 사옥이전. 1990년대: 사업축소기 1990 Nora Textile Limited HK(Hong Kong) 현지법인 설립: Nora Noh Japan 일본 현지법인 설립: 청담동으로 사옥 이전 후 토털패션브랜드로 사업 확장. 1991 중국 저장성 싸우싱 봉제공장 계약. 1996 할인점 전용브랜드 <노라>론칭. 1997 IMF 금융위기로 사업축소로 거점매장을 축소하고 여성복만 남김. 로 구분할 수 있다<표 1>. ‘패션입문기’인 1940년대 노라노는 1949년 미국 프 랭크 웨건 기술대학(Frank Waggon Technical Collage) 에서50) 의상을 전공했고 타백 오브 켈리포니아 (Taback of California)의 보조디자이너로 근무하며 패션계에 입문하였다. 대학에서 노라노는 미국식 평 면재단과 프랑스식 입체재단을 학습했고51) 보조디자 이너로 일하면서 파워 재봉틀 사용법부터 포장까지 분업화되어있는 미국상업패션시스템을 습득하였다. 같은 해 말에 귀국하여 신당동 본가 2층에 <노라노 양장점>을 개업했고 외교관 부인들의 파티의상을 제 작하며 한국패션계에 첫 발을 내딛었다. ‘브랜드 정착기인 1950년대 6.25전쟁 중 노라노는 대구를 거쳐 부산 광복동에 양장점을 열었고 1952년 환도 후 퇴계로에 <노라노의 집>을 오픈하며 무대의 상의 전성기를 맞는다. 1953년에는 종로로 1955년에 는 명동으로 매장을 이전하며 명동패션시대에 합류 했고 이 시기 유복한 여성들과 여배우를 위한 맞춤 복을 제작하였다. ‘사업확장기’인 1960년대 노라노는 1963년 미우만 백화점에서 최초의 디자이너 기성복컬렉션52)열었고 같은 해 명동사옥을 구입하였다. 1965년에는 하와이 호놀룰루(Hawaii Honolulu, 1965~66)에 기성복라인 쇼룸을 열어 첫 번째 해외 진출을 시도했고 1967년 에는 신촌지점을 열어 여대생들에게 할인된 가격으 로 제품을 제공하였다. 20세기 중·후반 한국패션 고찰  - 59 - ‘해외시장진출준비기’인 1970년대에는 신세계백화 점에 1975년 <노라노 코너>가 입점 되며 브랜드 대 중화가 가속화되었고 1977년에는 ㈜예림양행을 설립 해 해외진출을 위한 기반을 다졌다. 1978년 뉴욕 7번 가에 쇼룸을 오픈했고 이듬해에는 현지법인 Nora Noh Inc., New York 을 설립해 미국시장진출을 준 비하였다. ‘해외시장개척기’인 1980년대 노라노는 1980년 뉴 욕 메이시스(Macy's)백화점 1층 15개 쇼룸에 제품을 디스플레이하며 성공적으로 미국시장에 진입했고 1982년 미국시장 집중 공략을 위해 안산반월공단에 직영원단공장을 설립하여 실크와 비스코스원단을 디 자인하고 생산해 시장이 요구한 가격과 품질경쟁력 을 충족시켰다. 1983년에는 미국 서부지역을 위한 ‘노라노 웨스트(Nora Noh West)’를 론칭했고 같은 해 노스트롬(Nordstrom)백화점에 코너를 열며 주요 백화점 입점 권을 얻었다. 1980년대 노라노는 국내시 장을 제품생산거점으로 삼아 미국에서 사업을 확장 해나갔다. ‘사업축소기’인 1990년대 초에는 88올림픽 이후 급 상승한 인건비 등 국내외 시장변화로 안산반월공장 을 폐쇄했고 이를 대체하기위해 중국 저장성 싸우싱 봉제공장과 계약해 중국 OEM생산시스템을 구축하 였다. 또한 미국사업을 정리하고 수출시장의 무대를 아시아로 옮겨 1990년에는 홍콩(Nora Textile Limited, Hong Kong)과 일본(Nora Noh Japan)에 현지법인을 설립하였다. 1989년 명동에서 청담동으로 사옥을 이 전한 후 토털패션브랜드로서 국내시장에 재도전했으 나 IMF 금융위기로 여성복만을 남기고 현 체제로 사업규모를 축소했으며 1996년에는 할인점 전용브랜 드 ‘노라’를53) 론칭하였다. Ⅲ. 20세기 중․후반 노라노패션 분석 본 절에서는 앞서 고찰한 한국패션의 현황과 노라 노브랜드 성장과정의 연대별 분류를 바탕으로 노라 노패션의 활동시기별 특성을 심층분석하여 디자이너 와 관련된 한국패션사의 주요사건들을 추출한다. 노 라노패션의 활동 시기는 문화계인사들과 함께 교류 한 성장의 시대인 ‘패션입문기(1949~53)’, 파리의 트 렌드를 한국패션에 소개한 문화전도시대인 ‘오트 쿠 튀르기(1954~62)’, 사업 확장과 해외진출을 탐색한 기성복시대인 ‘산업화기(1963~79)’, 미국시장에서 성 공한 글로벌 패션시대인 ‘해외시장장악기(1980~89)’, 아시아시장 진출 및 국내시장 복귀시대인 ‘사업축소 기(1990~99)’로 분류된다<표 2>. 1. 패션입문기(1949~53): 문화계 인사들과 교류한 성장의 시대 ‘패션입문기(1949~53)’는 미국유학(1949)시절부터 서울 신당동양장점(1949), 6.25 전쟁 중 부산 광복동 양장점(1951-52)55), 환도 후 퇴계로 노라노의 집 (1952) 그리고 종로매장 이전 직후인 1953년 활동시 기로 노라노는 외교관들의 파티복과 당시 패션트렌 드를 주도한 미8군 장교클럽 가수 유정희, 박혜옥, 박단마의 무대의상, 연극협회<신협>56)의 ‘인어공주‘, ‘간디(1950)‘, ‘카르멘’, ‘햄릿(1951)’, ‘로미오와 줄리 엣’, 맥베스‘, ’오세로‘, 은장도’ 등의 극 의상을 담당하 며 <신협>회원인 이혜랑, 김동원, 이향, 서울발레단의 한동인57) 그리고 여성국극의 임춘앵58) 등과 협업을 통해 한국 문화 발전에 일조하였다<그림 2>. 물자가 부족했던 이 시기 노라노는 고객들이 해외 에서 구입해온 수입원단 그리고 양단과 같은 한복원 단을 사용했으며 부산 광복동양장점시절에는 무대복 의 비즈장식을 담뱃갑 내지와 맥주 캔을 오려 대체 하였다. 영화배우 최은희와 처음 작업을 시작 한 것 도 광복동양장점시절이다. 또한 <그림 1>에서 볼 수 있듯 1953년에는 “전쟁에도 문화가 있다”라는 콘셉 트로 미국 NBC TV를 위해 <미니패션쇼>를 열어 혼 란 속 한국에도 문화가 있었음을 세계에 알렸다. 비 록 방송사의 요청으로 기획되기는 했으나 NBC 패션 쇼는 비공식적으로 개최된 한국 최초의 디자이너 패 션쇼이다. 패션입문기의 대표디자인은 주로 무대의상 이었으며 대표작으로는 인도전통의상을 모티브로 한 ‘사리드레스(Sari dress, 1949)’, 무희들을 위한 브라 탑과 랩스커트 착장의 ‘새틴 룸바드레스(1950)’, 유정 희를 위한 ‘키스 오브 파이어 드레스(Kiss of Fire dress, 1952)’59), 햄릿 김동원을 위한 ‘벨벳케이프 服飾 第64卷 4號  - 60 - <그림 1> 미국 NBC 방송국을 위한 ‘미니 패션쇼’ 현장모습, 1953 - 노라노 제공 <그림 2> NBC 패션쇼 직후, 1953 - 노라노 제공 <그림 3> 노라노의 칼리지패션, 1956 - 노라노 제공 <그림 4> 플레어스커트 원피스를 입은 1950년대 미국 여대생들의 모습 - A Century of Fashion, p. 141 (1951)’와 박혜옥을 위한 썬드레스(Sundress, 195 3)60)가 있다<그림 2>61). 노라노는 ‘패션입문기(1949~53)’에 문화계인사들 과 교류하며 이들과 함께 성장했으며 해방과 전쟁으 로 혼란했던 이 시기에도 일부 계층에 한정되기는 하였으나 유행스타일과 패션은 존재했다. 2. 오트 쿠튀르(양장점)기(1954~62): 파리의 트렌드를 한국패션에 소개한 문화전도시대 ‘오트 쿠튀르(맞춤복)기(1954~62)’는 패션쇼와 프 랑스 해외연수를 통해 노라노가 기존의 양장점 형식 에서 벗어나 패션디자이너로 거듭난 시기이다. 노라 노는 1955년 명동매장이전 직후 미국식 칼리지패 션62)을 디자인해 주목받았고 이 시기 연예인들의 이 미지 구축에 관여하며 기존의 양장점들과 차별화된 브랜드 홍보 전략을 세웠다<그림 3, 4>63). 최은희 주연의 <은장도, 1955>, <꿈, 1955>, <춘희, 1959>, <자매의 화원, 1959>, 엄앵란의 <꿈이여 다시 한 번, 1959>, <동심초, 1959>, <젊은이의 양지, 1960>, <배신, 1963>, 최지희의 <아름다운 악녀, 1958>, <자 매의 화원, 1959>, 조미령의 <교차로, 1956>, <호동왕 자와 낙랑공주, 1956>, 김지미의 <양귀비, 1962> 등의 이미지가 노라노와의 협업을 통해 구축되었으며 이 들의 스타일은 대중에게 빠르게 확산되었다. 노라노는 유학시절 이미 미국전역에 퍼져있던 프 랑스 패션트렌드를 경험했고 부틱이 국내에서 정착 하자 1956년 6개월 동안 프랑스 아카데미 줄리아 아 트(Academy Julian Art)로 연수를 떠나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와 ‘크리스티앙 디올’, ‘니나 리치’의 부틱 바잉 쇼로 진행되었던 패션쇼를 참관하였다. 행사장 에서 노라노는 이들의 작품을 직접 착용해 보고 구 입하며 파리의 트렌드와 의복제작방식을 습득했고 귀국 직후인 1956년 11월 26일 오후 2시 반도호텔64) 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첫 컬렉션을 선보이는데 이것이 유럽식 패션쇼 형식을 충족한 한국 최초의 디자이너 패션쇼이다. 첫 무대의 1부는 원피스, 투피 스, 코트의 실용복라인으로 2부는 칵테일드레스, 롱 드레스, 웨딩드레스의 파티복라인으로 구성되었고 우 리원단을 사용해 디자인했는데 1부에는 고려모직(高 麗毛織)에 요청해 부드럽게 가공한 방모사65)를 2부 에서는 1950년대부터 계속 사용해오던 양단, 시폰, 자카트, 실크를 활용하였다. 이후 노라노는 특별 쇼 를 제외한 정기 쇼를 1년에 2번 열었으며 이들 중 리플렛이 남아있는 쇼는 1957년과 1958년 <노-라·노 팻션쇼>66), 1959년 , 1962 년 <노-라·노 횃션쇼>67)이다<그림 5>. 첫 번째 패션쇼 이후 노라노는 프랑스의 감성을 디자인에 담기위해 노력하였다.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라인 룩’과 함께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의 박시한 ‘콜레트라인’의 영향을 받았고 이와 더불어 ‘아리랑드 레스’68) 같은 한국 전통미를 재해석한 작품을 선보였 다. 또한 프랑스연수이후 2년에 한번 파리와 뉴욕을 방문해 자료를 수집했으며 <보그>, <엘르> 등 해외 잡지를 정기 구독해 최신트렌드를 지속적으로 습 득69)하기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기획된 노라노의 컬렉션은 한국패션에 세계트렌드를 20세기 중·후반 한국패션 고찰  - 61 - 유입시키는데 일조하였다. 전성기였던 이 시기의 대 표작은 최은희를 위한 <꿈, 1955>70)과 <춘희, 1959> 의상, 칼리지룩을 콘셉트로 한 ‘플레어스커트 원피스 (1956)’, 미스유니버스 한국대표 오현주를 위한 ‘아리 랑드레스(1959)’, ‘미아리실크71)원피스(1960)’가 있다 <그림 3>. 노라노패션의 제1전성기인 ‘오트 쿠튀르기(1954~ 62)’는 파리의 트렌드를 국내에 소개한 문화전도시대 로 디자이너패션에 해외트렌드가 반영된 시기이다. 3. 산업화기(1963~79): 사업 확장과 해외진출을 탐색한 기성복시대 ‘산업화기(1963~79)’는 1963~73년의 맞춤복과 기 성복을 혼용한 프레-타-쿠튀르(Pret-a-couture)기인 ‘과도기’와 1974~79년 기성복으로 사업패턴을 전환 하고 해외진출을 적극적으로 준비한 ‘도약기’로 구분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노라노가 맞춤복사업을 축소 하고 대량생산방식의 기성복라인으로 브랜드 운영체 재를 재편하며 해외시장공략을 준비한 기성복시대이 다. 과도기(1963~73)에 노라노는 기존의 개인을 위한 맞춤디자인인 오트 쿠튀르를 유지하면서 컬렉션에서 선보인 디자인을 주문받아 맞춤 제작해주는 프레타 쿠튀르를 새로운 브랜드 운영방식에 추가한다. 이를 위해 1963년 한국 최초의 <디자이너 기성복패션쇼> 를 미우만백화점에서, 1964년에는 화신백화점에서 개 최하며 브랜드 대중화에 힘썼고 이를 바탕으로 1965 년 하와이 호놀룰루 로얄 호텔에서 컬렉션을 열고 쇼룸을 오픈해 첫 번째 해외진출을 시도한다. 하와이 시절 2년 동안 노라노는 국내고객들과 사이즈의 차 이가 있었던 현지 고객들의 치수를 데이터화해 뉴욕 진출을 준비했으며 수출품에는 태극레이블을 부착하 였다<그림 6>. 1967년에는 여대생을 타깃으로 신촌에 매장을 열어 10% 할인된 가격으로 제품을 제공하며 고객층을 넓혀갔다. 또한 <대한방직협회>의 지원으로 개최된 1969년과 70년 2차례의 <목화아가씨 패션쇼>72) 를 필두로 1972년부터 1973년까지 코트라(KOTRA)의 지원으로 파리 프레타 포르테(Pret-a-Porter)박람 회73)에 참석해 해외시장 개척의 판로를 열었고 그 성과로 삭스 피프스 애비뉴(Saks Fifth Ave.)백화점 내 편집매장으로부터 제품을 수주 받아 뉴욕시장 진 입에 성공한다<그림 7>. 이후 노라노는 정부와 민간 단체의 협조로 우리섬유와 디자인의 우수성을 해외 에 알리는데 일조하였다. 도약기(1974~79)에 노라노는 기성복사업을 확장 하며 해외진출준비를 구체화한다. 이미 해외수주를 성공한 노라노는 1974년 상공부와 대한잠사협회의 지원으로 개최된 <견직물바이어패션쇼>를 계기로 우 리 실크의 품질과 가격경쟁력을 확인하고 뉴욕진출 을 결심한다<그림 8>74). 또한 1975년에는 신세계백화 점과 <기성복 패션쇼>를 개최하고 백화점 내에 <노 라노 코너>를 설치하는데 이 시기 노라노는 선경 (SK)의 제안으로 2년 동안 미국 수출용 OEM 블라 우스생산에 뛰어들면서 고급 기성복 대량생산라인을 구축한다. 시스템이 정착되자 노라노는 1978년 뉴욕 7번가에 쇼룸을 오픈하고 1979년에는 미국현지법인 (Nora Noh Inc)을 설립해 해외시장공략을 위한 준비 를 마친다. 산업화기 노라노는 영화의상과 함께 드리마의상 그리고 가수들의 무대의상을 디자인하였다. 촬영기간 이 길고 이미지메이킹 단계부터 작업을 함께해야했 던 영화와 가수들의 의상은 이전시대와 마찬가지로 역할의상을 캐릭터에 맞게 맞춤 제작해 판매했으며 단발성 촬영이 가능한 드라마의 경우는 기성복라인 을 협찬하였다. 문정숙 주연의 <만추, 1966>, TBC 일 요로맨스극장 <내멋에 산다, 1967>, <웃는 얼굴 다정 해도, 1967>를 위한 윤복희의 미니드레스, <커피한잔, 1969>을 위한 펄 시스터즈의 판탈롱 스타일이 노라 노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강부자, 나옥주, 남미리, 사 미자, 정혜선, 문혜란, 염매리, 윤여정, 윤소정, 태현실 등도 노라노의 디자인을 착용하였다. 대표디자인은 몸뻬와 한복을 대체할 부인복으로 선보인 ‘실크 새틴 홈웨어드레스(1965)’, ‘튜닉드레스(1965)’, ‘하운드 투 스 패턴앙상블(1969)’, 파리박람회 출품작인 ‘엔지니 어 프린팅원피스(1973)’, 신세계백화점 기성복패션쇼 출품작인 ‘슬리브리스 미니드레스(1975)’가 있다. ‘산업화기(1963~1979)’는 프레타 쿠튀르라인을 필 두로 국내시장의 고객층을 확산하고 해외시장진입의 服飾 第64卷 4號  - 62 - <그림 5> 1962년 03월 31일 오후 2시 그랜드호텔에서 개최된 ≪노-라·노 횃숀쇼≫의 초대장 겸 프로그램 - 노라노 제공 <그림 6> 하와이수출시절의 태극마크레이블, 1965 - 연구자 촬영 <그림 7> <목화아가씨 패션쇼>의 초대장 겸 프로그램, 1969 - 노라노 제공 <그림 8> <견직물 바이어 패션쇼> 직후 칵테일파티, 1974 - 노라노 제공 교두보를 만든 노라노패션 제2의 전성기로 이 시기 에는 정부와 민간단체의 공조와 지원으로 디자이너 들의 해외진출사업이 지원되었다. 4. 해외시장장악기(1980~89): 미국시장에서 성공한 글로벌 패션시대 ‘해외시장장악기’인 1980~89년은 노라노가 미국시 장에서 성공한 글로벌 패션시대이다. 미국법인설립 1 년 만인 1980년 노라노는 뉴욕 메이시스(Macy's)백 화점 1층 15개 쇼룸 전체에 옷을 걸며 해외 트렌드 를 추종하는 동양디자이너에서 벗어나 미국 트렌드 의 중심에 선 한국 패션디자이너로 거듭났다<그림 9>. 1982년 삭스 피프스 애비뉴백화점에 단독매장 <노라노코너(Nora Noh corner)>가 생겼고 1983년에 는 노스트롬(Nordstrom)백화점의 편집매장 <셉코너 (Savy corner)>에 제품이 입고되었으며 이후 노스트 롬에서 2년 블루밍데일(Bloomingdale's)백화점에서 1 년 동안 최우수판매매장으로 선정되었다. 노라노패션이 1980년대 미국시장에서 성공한 요인 은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는 원단공장과 고급기성 복제작라인의 직접 운영으로75) 디자인차별화와 가격 경쟁력을 모두 얻어냈고, 둘째는 사전준비를 통한 신 체치수 표준화 구축과 지역특성을 고려한 브랜드 세 분화정책으로 제품현지화에 성공했으며, 마지막으로 바이어들이 손쉽게 주문할 수 있도록 스타일번호체 계를 일원화해 디자인별 고유번호를 부여하였다. 또 한 이를 통해 지역별 선호 스타일을 추출하고 해당 아이템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재생산해 제품 순환 력을 높였다. 1974년 <견직물바이어패션쇼>에서 노라노는 이미 우리 실크의 품질과 가격경쟁력을 확인했고 1982년 이를 사업에 적용하기위해 안산반월공장에 직영원단 공장을 세웠다<그림 11>. 이미 유행디자인이 빠르게 모방되고 있던 미국시장에서 모방이 어려운 프린트 원단을 직접 생산하여 고급제품을 합리적인 가격으 로 제공 할 수 있었던 것이 노라노패션의 디자인 경 쟁력이었다. 공장 설립직후 노라노는 파리로 프린트 패턴 자료조사를 떠나 미술서를 구입했고 이를 활용 해 호안 미로(Joan Miro, 1893~1983)와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 1869~1954) 등의 작품을 재구성하 여 프린트패턴을 디자인하였다. 또한 노라노는 하와 이 프레타 쿠튀르시절 기록한 미국인들의 치수를 데 이터화해 동양인과 다른 서양인의 사이즈 문제를 해 결했다. 미국법인 설립이후 1983년 중반까지 뉴욕시 장을 타깃으로 실크제품을 주로 판매하는 를 단독으로 운용하다 1983년 8월부터 기 온이 온화한 로스앤젤리스와 달라스 지역을 위해 린 넨(linen)과 비스코스(viscose)를 사용한 젊은 감각의 저가라인인 를 내어놓으며 브랜드 분리전략으로 노라노는 지역맞춤식 현지화에 성공한 다76)<그림 10>. 그리고 디자인에 고유번호를 붙여 히 20세기 중·후반 한국패션 고찰  - 63 - <그림 9> 메이시스백화점 쇼 윈도우를 장식한 노라노의 의상들, 1980 - 노라노 제공 <그림 10> 의 컬렉션 드로잉, 1986 - 노라노 제공 <그림 11> 안산반월프린트공장 내부전경, 1982 - 노라노 제공 <그림 12> 청담동 <노라노 집>의 내부전경, 1990 - 노라노 제공 트디자인의 원단과 프린트패턴을 즉시 변경해 재생 산했고 바이어의 주문 간소화를 위해 표준화된 제품 번호시스템을 구축했다. 1980년대 노라노제품의 스타 일번호 표기방법은 4개의 숫자로 구성되며 첫 번째 번호는 제품제작년도를, 두 번째 번호는 원단프린트 패턴디자인을, 나머지 두 숫자는 디자인을 의미한다. 곧 ‘5175’는 ‘5’ 85년 ‘1’ 1번 프린트 원단으로 만든 ‘75’ 디자인을 말한다. 무늬가 없는 원단의 경우는 두 번째 숫자를 ‘0’으로 표시해 같은 해 생산된 동일 디 자인이라면 ‘5075’로 표시했다.77) 이외에도 노라노는 이미 구축된 안산공장시설을 이용하여 해외에서 OEM으로 수주 받은 스카프원단을 생산해 브랜드이 외의 수익원을 창출해냈다. 시즌별로 바이어 컬렉션과 함께 노라노는 1980년 주한미국 Women's Club의 후원으로 패션쇼를, 1989년에는 로마 모피회사와 협업 으로 를 여는 등 특별 쇼를 지속적으로 기획하였다. 대표작으로는 메이시스백화 점에 진열되었던 디자인인 원피스형 점퍼슈트 ‘1045 (1981)’, 미국 보그 광고에 실린 ‘프린트 오버 재킷과 블랙팬츠(1984)’, 베이지와 블랙 스트라이프 원피스 로 5년간 판매한 ‘5175(1985)’, 스트라이프무늬 실크 원피스인 ‘6014(1986)’, 바자 광고에 실린 ‘프린트 실 크원피스(1986)’ 그리고 재생산된 ‘5175’의 솔리드라 인 ‘7075(1987)’ 디자인이 있다. 노라노 제3의 전성기인 ‘해외시장장악기(1980~ 89)’는 신진디자이너들이 대거 주목받았던 국내시장 의 비중을 줄이고 발 빠르게 미국시장을 공략한 글 로벌 시대로 노라노는 국내에서 원단부터 제품제작 까지 일괄관리가 가능한 고급기성복 원스톱 제품생 산시스템을 구축해 가격 경쟁력을 지닌 고품질 디자 인을 전면애 내세워 미국시장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한국패션디자이너가 되었다. 5. 사업축소기(1990~99): 아시아시장 진출 및 국내시장복귀시대 ‘사업축소기’인 1990~99년까지는 노라노가 미국사 업을 축소하는 대신 아시아시장에 진출하며 국내시 장에 복귀한 시대이다. 노라노패션이 미국시장에서 철수한 배경은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첫째 글로벌 패션 환경의 변화로 프랑스와 이탈리아 브랜드들의 직영체제가 도입되었고 상업브랜드의 경쟁력이 높아 지면서 미국패션시장의 판도가 급변했으며, 둘째 국 내인건비의 상승으로 합리적인 가격으로 고급제품을 생산할 수 있었던 1980년대와 달리 제품생산단가가 상승해 가격경쟁력을 지켜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라노는 미국사업을 대신할 아시아 시장의 거점으로 1990년 홍콩(Nora Textile Limited, HK)과 일본(Nora Noh, Japan)에 현지법인을 설립했고 1년 전인 1989년 이미 국내시 장을 복귀를 위해 명동에서 청담동으로 사옥을 이전 하였다. 노라노는 1990년 안산반월공장의 문을 닫은 후 원단은 홍콩현지법인에서 직접 생산관리하고 의 服飾 第64卷 4號  - 64 - 활동시기구분 주요패션쇼 패션사적사건 패션입문기 (1949~1953): 문화계 인사들과 교류한 성장의 시대 -1953: 미국 NBC TV를 위한 <미니패션쇼> 외교관 부인, 신협, 여성국극 그리고 미8군 무대의상디자인 -1949: 미국 유학 후 외교관 부인들의 모임을 위한 파티복 제작. -1950-53: 신협, 서울발레단, 미8군 무대의상제작으로 파티복시장이 생성. -1953: “전쟁에도 문화가 있다”는 콘셉트로 미국 NBC TV를 위한 패 션쇼 개최 <비공식 노라노 최초의 패션쇼이자 한국 최초의 디자이너 패션쇼> -한복원단과 양장복지 모두 사용. 제1전성기 오트 쿠튀르 (맞춤복)기 (1954~1962): 파리의 트렌드를 한국패션에 소개한 문화전도시대 -1956: <제1회 노-라·노 팻션쇼>, 반도호텔. -1958: <노-라·노 팻션쇼> -1959: -1962: <노-라·노 횃션쇼> 파리 트렌드의 국내유입과 우리섬유개발 -1956: 칼리지패션(College Fashion)의 유행. 해외연수에서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크리스티앙 디오르, 니나리치의 컬렉션 관람 후 귀국 컬렉션에서 세계의 트렌드를 한국시장에 전파. 유럽식 패션쇼의 형식을 충족한 최초의 디자이너 패션쇼 개최. -고려모직과 양장에 맞는 방모사 개발. -트렌드잡지구독과 파리, 뉴욕 시장조사를 통해 세계의 트렌드를 지속 적으로 반영. -영화배우의상제작을 통한 패션트렌드 전파. 제2전성기 산업화기 (1963~1979): 사업확장과 해외진출을 탐색한 기성복시대 1) 과도기 (1963~73): 프레타 쿠튀르시대 2) 도약기 (1974~79): 기성복 시대 -1963: <기성복 패션쇼> 미우만백화점. -1964: <기성복 패션쇼> 화신백화점. -1965: -1969, 71: <목화아가씨 패션쇼> 극동호텔(69). 조선호텔(71). -1974: <견직물 바이어 패션쇼>, New York Plaza Hotel. <기성복 패션쇼>, 서울, Plaza Hotel. -1975: <기성복 패션쇼>, 퍼시픽호텔. 신세계백화점 주최. 기성복의 보편화와 정부, 민간단체의 지원으로 해외진출준비 -1963: 디자이너 기성복 패션의 시대가 열림. -몸뻬와 한복을 대체할 부인복 <홈웨어드레스> 디자인: 백화점에 기성 복 디자이너 코너를 설치로 미국식 쇼핑환경 조성. -1965: 하와이 시장진출, 국내디자이너의 해외단독 패션쇼. 수출용디자인에 태극레이블 부착. -1969: 대한방직협회의 지원으로 패션쇼 개최. -1972-73: Kotra ≪Paris 기성복(Prêt-à-Porter) 박람회≫국내패션디자 이너 지원으로 국내 디자이너의 해외시장 개척판로(販路)가 열림. -1974: 대한잠사협회와 정부의 지원으로 우리 실크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한 디자이너 패션쇼가 개최. -정부와 민간단체의 지원으로 목화, 실크 등 우리 원단사용이 증가. -1975: 신세계백화점 <노라노 코너> 입점, 대량생산 디자이너 기성복 체제 정립. -선경(SK)의 OEM 블라우스 생산으로 고급기성복생산체제 구축. -1978: New York 7th Ave. Show Room 오픈. -1979: Nora Noh Inc., New York 미국현지법인 설립. -드라마의상의 기성복협찬과 가수의 무대의상으로 인해 패션트렌드 전 파가 가속화 됨. 제3전성기 해외시장장악기 (1980~1989): 미국시장에서 성공한 글로벌 패션시대 -1980: , 주한미국 Women's Club. -시즌별로 바이어 패션쇼 개최. -1989: 국내제작시스템을 교두보로 한 미국시장장악 -1980: 메이시스백화점 쇼윈도에 제품 진열. -1982: 상업브랜드가 아닌 디자이너브랜드 최초로 원스톱 고급기성복 생산체제 설립, 안산반월공단. 뉴욕 삭스 피프스 애비뉴백화점에 <노라노 코너>오픈. -1983: 노스트롬백화점 <셉코너>에 디자인 입점. 로스앤젤리스와 달라스 지역을 위한 출시로 지역 <표 2> 노라노패션 활동 시기별 특성분석 20세기 중·후반 한국패션 고찰  - 65 - 에 맞는 브랜드 정책을 수립. -국내생산, 현지법인설립의 이원체제 운영으로 가격경쟁력이 있는 고 급제품 생산. -사전조사를 통해 수출용 치수체계 정립. -표준화된 제품번호시스템을 구축해 디자인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바 이어의 수주를 용이하게 함. -<보그>와 <바자> 등 현지매체에 지속적으로 광고를 게재해 브랜드 인 지도를 높임. 사업축소기 (1990~1999): 아시아시장 진출 및 국내시장복귀시대 -1991: 청담동 사업 오픈 기념 패션쇼. -고정고객을 위해 프레타쿠튀르 시즌 컬렉션을 개최. 토털패션의 도입과 새로운 유통시스템의 수용 -1990: 아시아시장 진출 및 청담동 거점매장 오픈으로 토털패션시스템 도입. 홍콩 및 일본 현지법인설립. -1991: 중국 저장성 샤우싱 공장과 OEM 계약을 통해 생산거점을 옮김. -1996: 이마트, 까르프 등의 할인점을 위한 전용브랜드 <노라> 출시. -1997: IMF로 여성복라인만 남겨 사업축소. 류제작은 1991년 중국 쌰우싱 봉제공장과 한국현지 책임자파견조건으로 OEM계약을 체결해 제작환경을 개선하며 가격경쟁력의 우위를 지켜내기 위해 노력 하였다. 노라노패션은 이 시기 아시아시장과 내수시장 전 략에 차이를 두었는데 수출품의 경우는 한국에서 제 작한 샘플을 중국으로 보내 OEM으로 생산하여 가 격경쟁력을 높인 기성복으로, 국내에서는 기성복라인 과 함께 고정고객들을 위해 산업화 도약기(1963~ 73)의 프레타 쿠튀르 방식을 재도입해 컬렉션에서 선보인 디자인을 맞춤복으로 판매하는 고급화전략으 로 시장에 접근하였다. 이에 청담동 매장을 토털패션 을 지향(志向)하는 거점매장으로 삼아 여성복뿐만 아니라 남성복, 아동복, 기타액세서리류 등을 함께 취급하였다.<그림 12> 하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해 외브랜드 유입과 IMF로 인해 1997년 여성복라인만 을 남기고 사업을 축소한다. 하지만 1996년 이미 변 화된 내수시장 환경을 읽어내며 이마트, 까르프, 나 산 끌레프 등 15개의 할인점을 위한 전용브랜드 <노 라>를 론칭78)해 저가의 기성복을 주력으로 내수시장 패턴을 전환하였다. ‘사업축소기(1990~1999)’는 노라노가 미국사업을 정리하고 아시아와 내수시장에 집중해 실속을 취한 국내시장복귀시대이다. Ⅳ. 20세기 중․후반 한국패션 분석 선행연구와 노라노패션연구로 밝혀진 한국패션사 적 주요사건을 고찰한 결과 1940년대부터 1990년대 한국패션의 특성은 다음과 같이 분석되었다<표 3>. 1940년대는 해방으로 인한 민족의식고취와 실용성 사이에서 의생활패턴이 혼란했던 ‘의생활 혼란기’로 여성복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양장점이 문을 열며 고 급 여성복시대가 도래(到來)했다. 1937년 여성복전문 양장점 ‘은좌옥’을 연 최경자가 활동하고 있는 가운 데 노라노가 패션계에 입문해 1940년대는 제1세대 한국패션디자이너시대의 시작점이 되었다. 대중의 스 타일과 경성을 중심으로 한 지식층의 스타일이 이분 화 된 이 시기는 여성복시장이 정립되지 않은 상황 에서 고급패션시장의 트렌드는 일제 강점기부터 기 반을 다져온 남성복이 주도했다. 1949년에는 신생활 장려위원회에서 간단복을 재정하여 활동에 용이한 양장의 보급에 힘썼다. 1940년대는 새로운 의복문화 생성이 정체된 가운데 부유층을 중심으로 한복과 양 장이 혼용되며 전통복과 서양복스타일의 명맥을 이 어갔다. 1950년대는 검열 없이 유입된 구제품과 디자이너 들의 노력으로 해외트렌드가 전파된 ‘서구문화확산기’ 로 1952년에는 제1회 신사복 패션쇼가, 1953년에는 NBC 방송의 기획으로 진행된 노라노의 미니패션쇼 服飾 第64卷 4號  - 66 - 시대 패션사적 사건 및 유행 스타일 대표디자이너79) 1940년대 패션사적 사건 유행스타일 최경자(은좌옥) -일제강점기 말 몸뻬와 앗빠빠가 국민복으로 강요. -해방 후: 여성복 양장점의 보편화시작점. 남성복 기술향상과 국내원단시장발전시작. 여학교들을 중심으로 교복제청움직임. 제1차 구제품유입. 배급품 스템프제도와 밀수 방지정책실시. -1949: 신생활장려위원회에서 <간단복> 제정. 부산에 신발공장이 밀집(등록기준 71개). -대중의 스타일과 고위층의 스타일이 명확히 구분됨. -남성복이 트렌드를 주도한 가운데 종로와 충무로 가 패션의 메카. -해방 전·후: 저고리 혹은 블라우스 에 몸뻬 착장이 보편화. -해방 직후: 여대생을 중심으로 통 치마에 저고리 착장과 개량한복이 유행. 군복스타일과 스타킹, 구두 등 서양 의복소품이 확산됨. 낙하산지로 만든 코트와 머플러. -밀수품 마카오복지와 빌로드. -부유층을 중심으로 한복과 양장이 혼용. 의생활 빈곤기: 제1차 구제품의유입과 의생활패턴의 혼란 1950년대 -전쟁 전: 대중의 의생활의 빈곤 속에 무대의상을 중심으로 서양 파티복이 소개됨. 부산광복동을 중심으로 디자이너 활동 및 구제품 전문 취급점이 생김. -1952: 전시 생활 개선령 시행으로 의복과 사치품 규제. <제1회 신사복 패션쇼> 개최. -1953: 노라노, NBC를 위한 <미니패션쇼> 개최. -전쟁이후: 제2차 구제품 유입. 남대문과 동대문 상권 형성. -1954: <최경자복장연구소> 설립. -1956: 노라노, 한국 최초의 디자이너패션쇼 개최. -1957: <대한복식연우회> 창설. 양장점을 탈피한 패션디자이너시대가 열림. -1959: 제일모직, 우리기술로 모직생산, 나일론 국 내생산. -디자이너들의 해외연수와 패션잡지구독을 통해 해외트렌드가 국내에 유입됨. (노라노: 파리 연수 / 서수연, 김경애, 석주선, 한 희도 등: 일본 산업시찰) -명동이 패션의 메카로 부상. -<여원>, <여성계>, <주부생활>등 12개 여성잡지 창간. -전쟁 기: 1940년대 몸뻬와 한복의 혼재. -전쟁 후: 구제품을 염색해 리폼한 코트, 스웨터, UN점퍼, 낙하산지 블라우스, 밀리터리스타일. -칼리지패션과 크리스토발 발렌시아 가, 크리스티앙 디오르, 니나 리치 스타일이 유행. -파티복으로 전통한복을 개량한 <아 리랑드레스> 유행. -대중의 스타일은 궁핍하였으나 신 협, 서울발래단, 여성국극을 통해 무대의상이 발전했고 서양복과 전 통한복 유행스타일이 대중에게 소 개됨. 김경희(마드모아 젤), 노라노, 서수현(아리사), 송옥, 이병복, 엘리제, 한희도, 임복순 (미성양장점) 서구문화 확산기: 제2차 구제품유입과 빈곤 속에 피어난 한국패션디자인 1960년대 -섬유산업이 국가기간산업으로 선정됨. -한복의 의례복화와 양장의 보편화 정착. -개량한복의 출현. -1961: <대한디자이너복식협회> 결성. -1962: 정부지원으로 해외디자이너 초청 컬렉션개최. -1963: 노라노가 최초의 디자이너기성복 컬렉션을 미우만백화점에서 개최. -간편복의 보편화와 한복을 대신할 홈드레스의 출현. -영화, 드라마, 음악 등 미디어의 영 향으로 슬리브리스, 양단드레스, 리 버서블코트, 핫팬츠, 미니스커트 등 해외패션 스타일이 전파됨. -여대생: 부풀린 헤어, 7~8부의 블 김순희 (제일편물), 배천범 (석경의상실), 박윤정(미스박 테일러), 이용렬(벵탕), <표 3> 20세기 중 · 후반 한국패션 분석 20세기 중·후반 한국패션 고찰  - 67 - -디자이너 드라마의상 협찬시작. -백화점에 디자이너 기성복 코너가 입점 되기 시 작해 미국적 쇼핑환경이 조성됨. -1965: 우리 디자인의 해외수출이 시작됨. -1966: 앙드레김이 파리에서 패션쇼 개최. -1969: 대한방직협회의 디자이너 컬렉션 지원. -합성섬유와 프린트기술의 발달. 라우스, 미니스커트, 중간 굽의 뾰 족한 펌프스. -50년대 디오르 스타일의 영향으로 A라인과 H라인이 계속 유행. -60년대 말 판탈롱팬츠 출현. -폴리에스테르와 저지에 프린트된 강렬한 색상의 프린트 패턴. -옵아트, 팝아트의 영향. 앙드레김, 조세핀조 복식현대화 성취기: 한복의 의례화와 양장의 보편화 1970년대 -맞춤복과 기성복 그리고 합성섬유와 천연섬유의 혼재. -섬유회사의 패션회사전환으로 상업브랜드가 패션 시장을 장악하여 대중을 위한 기성복 시장이 열 림.(레나온, 논노, 반도패션, 경방, 모라도, 라보테, 벨라, 버킹검, 맥그리거, 톰보이 등) -1972-73: 코트라, 우리 디자이너의 해외진출지원. -1972: 유신체제 패션물 TV방영 금지 및 호텔 패 션쇼 금지. -1973: 노라노, 식스 피프스 애비뉴백화점에서 재 품 수주. -1974: 우리 실크의 우수성을 해외에 알리기 위한 대한잠사협회의 노라노 뉴욕패션쇼 지원. -1975: 신세계백화점에 <노라노 코너> 입점. -1979: 탄성섬유 스판텍스의 개발로 스포츠웨어 시장 확산. -백화점 기성복코너의 보편화로 미도파백화점에 신진 디자이너 코너인 <패션 스트리트> 오픈. -디자이너패션과 상업패션시장 분리. -상업패션브랜드의 컬렉션 디자이너 고용시작. -원단산업의 발달로 동대문시장의 활성화. -국내 디자이너의 해외진출 본격화. -특성화 부티크의 출현(예: 홈웨어) -풍기문란 죄에 장발과 미니스커트가 포함됨. -프린트. -팝과 록가수의 스타일이 트렌드를 주도하여 캐주얼이 유행. -펑크는 부분적으로 수용되었고 히 피스타일이 트렌드를 주도함. -장발, 판탈롱, 핫팬츠, 미니스커트, 넓은 벨트, 빅 숄더 백, 통굽의 믹 스 앤 매치. -레이어드에 용이한 니트웨어와 다 양한 길이의 스커트가 유행. -남성정정: 콘티넨탈룩. -청바지가 보편화 됨. Mrs고, 박항치, 이동수, 이신우, 오은환, 진태옥, 트로아조, 한혜자 패션산업의 혁신기: 상업브랜드의 도약과 디자이너 기성복의 보편화 1980년대 -1983: 교복자율화로 중저가 영 캐쥬얼 시장이 급 성장. <제1회 대한민국섬유디자인경진대회>개최. -1985: 정부의 지원으로 국내디자이너들이 파리 프레타 포르테 박람회 <살롱 드 포르테 페미닌> 참가. -1989: 결성으로 한국패션컬렉션의 기틀 이 만들어짐. 해외여행자율화로 스타일이 직접 전파환경이 조 성됨. -패션디자이너브랜드의 활동이 활발해짐. -국내디자이너의 해외시장진입성공. -디자이너 컬렉션에서 한국의 전통을 모티브로 한 -가죽, 청제품의 유행. -모피와 인조모피 트리밍, 패딩아이 템, 패치워크. -빅실루엣, 파워슈트 등 과시적인 스타일. -상의 강조: 빅 재킷에 미니스커트 혹은 디스코바지. -하의강조: 블루종에 레깅스 혹은 스키니. -레이어드와 유니섹스스타일의 혼재. -디자인에서 컬러감이 중요해져 비 비드(vivid)와 뉴드럴(neutral)계열 모두 유행. 김동순, 김창숙, 루비나, 박동준, 박윤수, 설윤형, 손정완, 이상봉, 하용수, 홍미화 服飾 第64卷 4號  - 68 - 디자인이 전개됨. -디자이너 직영공장 출현으로 디자이너브랜드의 상업화가 가속화됨. -캐릭터 캐주얼과 액티브스포츠웨어 시장의 급부상. -해외디자이너브랜드의 라이선스 레이블계약이 남 성복과 액세서리 부문을 중심으로 체결됨. -영 캐주얼부문의 라이선스 브랜드 론칭으로 기술이 전이 이루어져 국내패션시장투자패턴이 다양해짐. -국내생산브랜드의 의존이 높으나 해외 트렌드가 스타일을 주도함. 패션산업의 전성기: 디자이너브랜드의 확산과 해외 라이선스 브랜드의 도약 1990년대 -1991: 패션컬렉션 시작으로 해외컬렉션 시스템을 갖춘 디자이너 패션시대 개막. -1992: 신진디자이너를 중심으로 조직. -국내디자이너 해외패션시장진출확산: 파리컬렉션 (프레타 포르테), 뉴욕컬렉션. -1995: 재정경제원의 ‘수입개장정책 발표’로 해외 패션브랜드의 직영 진출이 가능해짐. 남대문과 압구정동에 해외브랜드 편집 매장이 늘 어남. -1996: 문화관광부 <한복 입는 날> 제정. -1998: IMF여파로 이신우 등 디자이너 브랜드와 의류회사의 파산으로 패션시장 성장둔화가 시작됨. 유통시장의 변화로 생겨난 이마트, 까르프, 테스 코와 같은 대영할인매장이 진출로 중·저가 PB (Privet Brand)가 생겼고 <노라> 등 할인점전용 디자이너 브랜드가 출시 됨. -패션전문아울렛의 등장과 두타, 밀리오레 등 동 대문중심 상권형성. -해외라이선스 잡지의 진출로 트렌드전파가 가속 화됨. -아동복시장의 성장. -1990년대 말: 케이블 TV 쇼핑 채널과 인터넷 쇼 핑시작. -개인의 스타일이 중요해짐. -X세대, N세대, 오렌지족, 힙합족, 명품족, 미시족 등 특정 소수계층 의 스타일의 유행. -10대 가수들이 영 패션리더로 급부 상해 기성세대의 클래식라인과 10 대의 패션이 명확히 구분됨. -서태지의 힙합패션, 노출이 심한 배꼽 티셔츠, 찢어진 청바지, 무스탕. -해외직수입브랜드가 트렌드 주도한 가운데 미니멀 한 젠스타일과 로맨 틱스타일이 공존. 김영주, 노승연, 문영희, 박윤정, 박춘무, 송지오, 신장경, 우영미, 이영희. 임선옥, 지춘희, 최연옥 패션시장다각화기: 패션컬렉션 시스템의 정립과 유통체제의 변화 가, 1956년에는 노라노의 한국 최초의 디자이너패션 쇼가 열렸고, 1957년에는 서수정의 의상발표회가 개 최되었다. 1957년 대한복식연우회가 창설되었고 최경 자, 노라노, 서수정, 서수연, 김경애, 석주선, 송옥, 엘 리제, 임복순(미성양복점)이 활동했으며 이들의 매장 이 있었던 명동이 패션의 메카로 급부상하였다. 1956 년 노라노는 프랑스 파리연수를, 이후 대한복식연우 회 주최로 서수연, 김경애, 석주선, 한희도 등은 일본 으로 산업시찰을 떠나 해외트렌드와 선진의복 제작 시스템을 받아들이며 양장점시대를 벗어난 패션디자 이너시대가 열렸다. 1950년대 초반은 무대복이 후반 은 여성복이 고급패션시장의 트렌드를 주도한 가운 데 1955년 신생활복착용법안의 통과로 양장보편화가 정책화되었다. 1950년대는 대중의 스타일은 빈곤했으 나 구제품이 검열 없이 유입되고 디자이너들이 해외 트렌드를 소개하면서 서구식 의복문화가 확산되었다. 1960년대는 양장의 보편화와 한복의 의례화가 정 립된 ‘복식현대화성취기’로 1961년 대한디자이너복식 협회가 결성되었고 같은 해 재건 국민복 콘테스트, 1962년에는 정부주최로 해외디자이너 초정 패션쇼가 열려 문호(文豪)가 개방되며 의복현대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1963년에는 노라노가 최초의 디자이너 20세기 중·후반 한국패션 고찰  - 69 - 기성복패션쇼를 미우만백화점에서 개최했고 1965년 에는 하와이시장에 진출해 해외시장공략을 시작하였 다. 제1세대 디자이너들이 활동이 활발한 가운데 제2 세대 디자이너 김순희(제일편물), 배천범(석경의상 실), 박윤정(미스박 테일러), 이용열(뱅탕), 앙드레김, 조세핀조가 주목받았고 이들 중 앙드레김은 1966년 파리에서 패션쇼를 개최하였다. 드라마의상과 윤복희, 펄시스터즈 등 가수들의 무대의상이 주목받으면서 이들의 의상을 협찬한 디자이너들의 스타일이 유행 을 주도하였다. 또한 국가기간사업으로 정부의 지원 을 받고 있던 대한방직협회를 비롯한 섬유사업관련 민간단체에서 우리원단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디자이너들을 지원을 시작하였다. 1960년대는 패션디자이너들의 디자인 콘셉트가 ‘한국전통을 모티 브로 한 서양복’과 ‘서구의 트렌트를 직접 수용하는 패턴’으로 이분화 된 가운데 디자이너의 맞춤복이 스 타일을 주도했고 기성복시장의 성장이 시작된 서양 의복정착기이다. 1970년대는 상업브랜드의 도약과 디자이너 기성복 이 보편화된 ‘패션산업혁신기’로 1960년대 섬유회사 들이 패션부문으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레나온, 논노, 반도패션, 경방, 모라도, 라보테, 벨라, 버킹검, 맥그리 거, 톰보이 등이 론칭했으며 합성섬유와 천연섬유가 혼재한 가운데 1979년 탄성섬유인 스판텍스의 개발 로 스포츠웨어 시장이 확산되었다. 맞춤복체제에서 벗어난 디자이너들의 기성복사업이 본격화된 것도 이 시기이다. 1970년대 초반 코트라(KOTRA)는 디 자이너들의 파리박람회를 지원했으며 대한잠사협회 역시 우리 실크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노라노의 뉴욕컬렉션을 후원했다. 1975년 신세계백화점에 <노 라노코너>가 입점 되었고, 미도파백화점은 신진 디자 이너 코너인 <패션스트리트>를 열어 제3세대 디자이 너 진태옥, 이신우, 트로아조, 박항치, 한혜자, ‘Mrs. 고’, 오은환 등의 고급 기성복 제품을 진열하며 디자 이너 기성복 브랜드 시대를 열었다. 1970년대는 1960 년대 섬유회사가 패션사업에 진입하여 상업브랜드가 시장을 장악했으며 백화점 내 디자이너 기성복 코너 설치가 보편화되며 대중을 위한 기성복 시장이 열린 기성복패션시스템의 확립기로 정부와 민간단체의 지 원이 확산되어 디자이너들의 해외진출 판로가 열린 패션산업혁신기이다. 1980년대는 디자이너브랜드가 확산되고 해외라이 선스브랜드가 도약한 ‘패션산업전성기’로 1985년 정 부의 지원으로 디자이너들이 파리 프레타 포르테 박 람회에 대거 참석했고 이들은 1989년 스파(SFFA)가 결성하며 한국패션컬렉션의 기틀을 마련했다. 노라노 는 1982년 논스톱 고급기성복생산시스템을 안산반월 공단에 설립해 국내생산 해외 판매 전략으로 가격경 쟁력이 있는 고급제품으로 미국시장을 장악하며 한 국패션디자이너의 위상을 세계에 알렸다. 제3세대 디 자이너들과 함께 설윤형, 루비나, 김동순, 김창숙, 박 윤수, 손정완, 이상봉, 홍미화, 장광효 등이 국내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디자이너브랜드는 전성기를 맞는다. 과시적인 1980년대 사회적 분위기와 전국으로 확산 된 백화점 유통망의 구축도 이러한 행보에 힘을 실 었다. 남성복과 액세서리제품을 중심으로 해외 디자 이너 브랜드들의 라이선스계약이 체결된 것도 이 시 기이다. 1983년 교복자율화로 이랜드와 같은 청소년 패션브랜드가 출현했고 이들을 타깃으로 한 게스, 리, 리바이스, 조다쉬, 서지오바렌테 등 라이센스 브랜드 데님시장이 급성장했으며 뱅뱅, 에드윈 등의 국내 진 브랜드도 경쟁대열에 합류했다. 또한 나이키, 아디다 스, 라피도 등의 스포츠브랜드들 역시 호황을 맞았다. 타깃이 10년 이상 내려간 여성복시장에서는 1980년 대식 클래식라인이 주류를 이룬 가운데 후반에는 비 비드컬러를 콘셉트로 한 캐릭터 브랜드들이 출현했 다. 1980년대는 패션디자이너들이 고급기성복시장과 트렌드를 주도한 가운데 상업브랜드의 라이선스 계 약 체결로 기술이전이 현실화되며 의류제작환경이 개선되고 해외 브랜드의 디자인 일부가 유입된 패션 산업전성기이다. 1990년대는 패션디자이너컬렉션 시스템이 정립되 고 유통체제가 변화한 ‘패션시장다각화기’로 1991년 ‘스파(SFFA)’컬렉션을 시작으로 디자이너 부틱 쇼에 서 벗어난 도시 중심의 시스템을 갖춘 디자이너컬렉 션 시대의 막이 올랐다. 1992년에는 신진디자이너를 중심으로 ‘뉴 웨이브인 서울’이 조직되어 한국패션디 자이너 컬렉션 체제가 이분화 된다. 제3세대 디자이 服飾 第64卷 4號  - 70 - 너들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파리와 뉴욕컬렉션 진출 의 기회를 얻는 가운데 김영주, 노승연, 박윤정, 박춘 무, 송지오, 신장경, 우영미, 임선옥, 지춘희, 최연옥 등이 자신만의 색깔을 내세워 국내에서 활동하였다. 상업브랜드는 클래식라인과 마니아계층을 집중 공 략하는 고가정책브랜드들이 성공을 거두었고 서태지 와 아이들, HOT의 영향으로 10대들이 중심이 된 영 캐주얼 시장을 타깃으로 중저가 캐주얼 브랜드들이 IMF이전 마지막 호황을 누리며 대거 론칭하였다. 한 국패션시장에서 중소기업브랜드들이 성공할 수 있었 던 시기도 1990년대이다. 1995년 정부의 수입개방정 책발표로 패션계는 혼란기에 접어드는데 1970년대부 터 사업을 키워오던 나산 등 기성브랜드들의 몰락도 이 시기 시작되었다. 반면 해외직수입편집매장이 남 대문과 압구정동을 중심으로 늘어나면서 해외브랜드 의 인지도가 높아졌고 이는 2000년대 이들 브랜드의 한국시장 직영 진출에 도움을 주었다. 정부의 지원으 로 해외에 진출하며 사업을 확장한 디자이너들 역시 이 시기 사업에 어려움을 격어 1980년대 도쿄 컬렉 션의 초대디자이너로 패션쇼를 선보였던 이신우(오 리지날리)와 김창숙 등이 IMF를 극복하지 못하고 1998년 파산하였다. 변화된 유통체재에 맞추어 노라 노는 할인점 전용브랜드 ‘노라'를 출시해 이마트 까 르프, 나산 클레프 등 15개의 할인점에 공급했고 LG 패션의 스포츠캐주얼 ‘포맥스', 코오롱의 ‘이니지오', 제일모직의 니트 브랜드 ‘펠리체 폰타나', 삼성물산의 ‘위크엔드' 등이 할인점 전용으로 출시되어 어려운 시장상황을 해쳐나갔다. 또한 패션전문아울렛이 등장 하고 두타, 밀리오레 등 동대문중심의 상권이 형성된 것도 이 시기이다. 1990년대는 스타일면에서는 미니멀한 젠(zen)스타 일과 로맨틱스타일이 공존했고 세대별로 구분되는 세 대의 취향이 중요해진 가운데 해외 직수입 브랜드의 유입과 케이블 TV 쇼핑채널, 인터넷 쇼핑이 론칭되 며 더욱 심해질 경쟁을 예고한 패션시장급변기이다. Ⅴ. 결론 본 연구의 목적은 제1세대 한국 패션디자이너 노 라노의 활동과 선행연구를 분석하여 20세기 중․후 반 한국패션의 발전과정을 고찰하는데 있었다. 노라 노는 해방이후인 1949년부터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 는 제1세대 한국 패션디자이너 중 한명으로 본 연구 에서는 노라노패션 연구를 통해 한국 근현대 패션사 의 중요사건을 추출할 수 있었다. 노라노 패션의 연혁을 분석한 결과 브랜드의 성장 과정은 1940년대 ‘패션입문기’, 1950년대 ‘브랜드정착 기’, 1960년대 ‘사업확장기’, 1970년대 ‘해외시장진출준 비기’, 1980년대 ‘해외시장개척기’, 1990년대 ‘사업축소 기’로 고찰되었다<표 1>. 본 연구의 결과 디자이너 노라노의 활동시기별 특 성은 첫째 해외유학 후 6.25전쟁까지 문화계인사들과 의 교류를 통해 성장한 ‘패션입문기(1947-53)’, 둘째 파리의 트렌드를 한국 패션에 소개한 ‘오트 쿠튀르 (양장점)기(1954-62)’, 셋째, 사업확장과 해외진출을 탐색하며 디자이너 패션브랜드의 산업화를 이루어낸 ‘기성복기(1963-79)’, 넷째, 미국시장에서 성공한 글 로벌 패션시대인 ‘해외시장장악기(1980~89)’, 마지막 으로 아시아시장에 진출하고 내수시장으로 복귀한 ‘사업축소기(1990~99)’로 구분할 수 있었다<표 2>. 첫째, ‘패션입문기(1947-53)’는 문화계인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무대의상을 제작하며 디자이너로 성장 한 시기이다. 미국유학(1949)을 시작으로 6.25전쟁 전 서울 신당동양장점(1949)과 전쟁 중 부산 광복동양 장점(1950-52) 활동기로 이 시기 노라노는 당시 패션 트렌드를 주도한 미8군 무대복을 비롯해 ‘인어공주’, ‘간디’, ‘카르멘’, ‘햄릿’, ‘은장도’ 등의 무대의상을 담 당했고 연극협회 신협구성원들과 여성국극의 임춘앵 과 교류하며 성장했다. 해방과 전쟁으로 혼란했던 당 시의 사회적 환경과는 동떨어져 보이나 노라노의 활 동을 통해 일부계층이기는 하나 유행스타일과 패션 이 존재했음이 증명되었다. 둘째, ‘오트 쿠튀르(맞춤복)기(1954-62)’는 파리의 트렌드를 한국패션에 소개한 문화전도의 시대로 이 시기는 노라노가 패션쇼와 프랑스 해외연수를 통해 기존의 양장점 형식에서 벗어나 패션디자이너로 거 듭난 시기이다. 1956년 초 칼리지 패션을 유행시켰으 며,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와 ‘크리스티앙 디올’, ‘니 20세기 중·후반 한국패션 고찰  - 71 - 나 리치’ 쿠튀르 컬렉션 참관과 프랑스 아카데미 줄 리아 아트연수를 통해 노라노는 유학시절 경험한 미 국적 실용주의에 프랑스패션의 감각을 담았고 귀국 후 세계의 트렌드를 한국 패션시장에 전파하며 주목 받는다. 당시 노라노의 의상은 크리스토발 발렌시아 가와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 쿠튀 르 스타일 그리고 한국 전통미를 재해석한 작품으로 구분된다. 이 시기는 노라노가 한국시장에서 가장 활 발히 활동한 제1전성기로 최은희, 엄앵란 등 영화배 우의 이미지 구축에 관여하며 차별화된 브랜드 홍보 전략을 세웠다. 셋째, ‘산업화기(1963-79)’는 사업확장과 해외진출 을 탐색한 기성복시대로 이 시기는 과도기(1963~ 73)인 프레타 쿠튀르시대와 도약기(1974~79)인 기 성복시대로 구분된다. 1963년 미우만백화점 기성복패 션쇼를 기점으로 시작된 과도기에 노라노는 기존의 맞춤복라인을 유지하면서 프레타 쿠튀르방식을 브랜 드운영체제에 추가한다. 또한 1965년 하와이시장에 진출했으며 1967년에는 신촌에 매장을 오픈해 여대 생들을 공략하며 브랜드 확장을 시작한다. 또한 코트 라의 지원으로 1972~73년까지 파리 프레타 포르테 박람회에 참석하며 해외시장의 판로를 개척한다. 기 성복기인 도약기에 노라노는 정부와 민간단체의 지 원을 받아 지속적으로 해외에서 우리원단과 자신의 디자인을 알리는 패션쇼를 개최하며 한국원단으로 디자이너 기성복시대를 열었다. 또한 선경(SK)의 OEM 블라우스를 생산하여 고급기성복생산시스템을 정립하고 1978년 뉴욕에 쇼룸을 1979년에는 미국현 지법인을 세워 해외진출을 본격화한다. 산업화체제를 구축한 이 시기는 노라노패션 제2의 전성기이다. 넷째, ‘해외시장장악기(1980~89)’는 미국시장에서 성공한 글로벌 시대로 노라노는 1980년 메이시스 (Macy's)백화점 쇼룸 전체에 작품을 디스플레이하며 해외 트렌드를 모방하는 동양디자이너에서 벗어나 미국스타일을 주도하는 한국패션디자이너로 거듭났 다. 1982년에는 반월공단에 직영 프린트 원단공장을 세워 시장장악에 속도를 냈고 같은 해 삭스 피프스 애비뉴백화점에 <노라노코너>를 입점 시켰다. 1983년 에는 노스트롬 백화점 <셉코너>에 디자인을 제공했 고 브랜드를 분리시켜 뉴욕은 실크를 주력으로 하는 를 달라스는 린넨과 비스코스를 주 력으로 하는 저가라인 를 론칭해 지역별 선호디자인과 기후에 맞는 제품을 출시하였 다. 또한 스타일번호를 4개의 숫자체계로 일원화해 제품재생산과 바이어들의 수주를 용이하게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노라노는 모방이 어려운 프린트원단의 직접생산과 고급기성복제작 직영체제를 바탕으로 가 격경쟁력이 있는 고품질 제품을 생산하고 사전조사 를 통해 서양인의 치수를 표준화해 미국시장에서 성 공하였다. 지역특성을 고려한 제품라인구성과 스타일 번호 규격화를 통한 제품관리시스템도입한 이 시기 가 노라노 제3의 전성기이다. 다섯째, 사업축소기(1990~99)는 노라노가 미국시 장을 접고 아시아시장진출과 동시에 내수시장으로 복귀한 시대이다. 아시아시장 진출을 위해 1990년 홍 콩에 텍스타일 생산현지법인과 일본현지법인을 세웠 으며 88올림픽이후 인건비상승으로 가격경쟁력이 떨 어진 안산반월공장을 정리하고 1991년 중국 공장과 OEM계약을 통해 가격우위를 지켜냈다. 상업기성복 체제의 해외시장과 달리 국내시장은 고급화전략으로 토털 패션브랜드화를 선언하며 남성복, 아동복, 기타 액세서리류로 사업을 확장했고 기성복과 함께 1960 년대식 프레타 쿠튀르 방식을 재도입한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해외브랜드 유입과 IMF로 인해 1997년 여성복라인만을 남기고 현 상태로 사업을 축 소한다. 1996년 할인점 전용브랜드 '노라'를 출시해 변화된 시장에 적응한 이 시기는 실속기이다. 제1세대 패션디자이너 노라노 연구를 통해 추출된 20세기 중․후반 한국패션사의 주요사건은 다음과 같다: 1) 1953: NBC를 위한 미니패션쇼 개최, 공중 파에 방영된 비공식 한국 최초의 디자이너패션쇼, 2) 1956: 최초의 디자이너패션쇼 개최, 반도호텔, 3) 1963: 최초의 디자이너 기성복패션쇼 개최, 미우만백 화점(현. 롯데백화점자리), 4) 백화점에 디자이너 코 너를 설치하여 미국식 쇼핑환경 조성, 미우만백화점 (1963), 신세계백화점(1975) 등, 5) 1965~66: 프레 타 쿠튀르로 하와이시장 진출, 한국 패션디자이너 최 초의 해외직영 진출, 6) 1969, 1971: 대한방직협회와 服飾 第64卷 4號  - 72 - YMCA의 후원으로 <목화아가씨 선발 자선패션쇼> 개최, 제1세대 모텔 이희재, 변자영 발굴 6) 1972~ 73: 코트라(Kotra)의 지원으로 파리 프레타 포르테 (Pret-a-Porter)박람회 참가, 뉴욕 삭스 피프스 애비 뉴백화점에서 제품 수주, 8) 1974: 상공부와 대한잠 사협회의 후원으로 뉴욕 프라자 호텔(Plaza Hotel) 패션쇼 개최, 우리 실크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림, 9) 1980: 메이시스백화점 쇼윈도에 제품진열, 한국 패션 디자이너의 미국시장 장악 사례, 10) 1982: 프린트 원단공장 설립, 안산반월공단: 삭스 피프스 애비뉴백 화점 <노라노코너> 입점, 11) 1983: 지역의 특성을 고려하여 브랜드 세분화 (Nora Noh West와 East 론 칭): 노스트롬백화점 <셉코너> 단독입점, 12) 한 · 중 수교(1992)이전 1991년 중국 저장성 샤우싱 공장 과 계약하고 직접 관리체재 OEM방식으로 제품생산 (1991), 13) 1996년 IMF금융위기를 예측하여 할인점 전용브랜드 <노라> 론칭. 선행연구와 노라노패션 고찰결과 1940년대부터 1990년대 한국패션은 다음과 같이 분석되었다<표 3>: ‘의생활빈곤기’인 1940년대는 해방으로 인한 민 족의식고취와 실용성사이에서 의생활패턴이 혼란한 가운데 제1차구제품의 유입되고 여성복 전문 맞춤 부틱들이 생겨난 양장점시대이다. ‘서구문화확산기’인 1950년대는 제2차구제품이 유입되었고 빈곤 속에서 도 1950년대는 최경자, 노라노, 서수연, 김경희 등 제 1세대디자이너들이 프랑스, 일본 등 해외연수와 산업 시찰을 통해 선진기술과 해외 트렌드를 습득해 작품 을 발표하여 양장점에서 벗어난 한국패션디자이너시 대가 열렸다. ‘복식현대화성취기’인 1960년대는 한복 의 의례화와 양장의 보편화가 이루어지면서 디자이 너들의 부틱 패션쇼가 활발히 개최되었고 정부주도 의 해외 친선 패션쇼가 열려 문호교류가 일어났으며 제1세대 디자이너들의 활발히 활동한 가운데 제2세 대 디자이너들이 출현하였다. ‘패션산업혁신기’인 1970 년대는 청년문화가 확산되었고 이전시대 섬유산업을 주도하던 대기업들이 패션사업에 진출하면서 상업브 랜드들이 도약한 기성복시대이다. 또한 호텔 패션쇼 금지 등 각종규제가 있었으나 우리의 원단과 디자인 을 세계에 알리려는 정부와 민간단체의 노력이 있었 으며 백화점에 디자이너 코너가 생기면서 디자이너 기성복시대가 열렸다. ‘패션산업전성기’인 1980년대는 디자이너브랜드가 성장하고 해외라이선스브랜드가 도 약했으며 교복자율화로 유스패션이 부상하며 영 캐 주얼시장이 확산되었다. 정부의 지원으로 제3세대 디 자이너들이 파리 프레타 포르테 박람회에 참가하며 해외시장을 타진한 가운데 노라노는 미국시장에서 성과를 얻었다. ‘패션시장다각화기’인 1990년대는 국 내 상업브랜드의 급성장한 가운데 부틱 쇼에서 벗어 난 도시중심의 패션컬렉션시스템이 ‘스파(SFFA)’와 ‘뉴웨이브인 서울’을 통해 정립된 시기로 제3세대와 제4세대 디자이너들이 파리와 뉴욕컬렉션에 진출하 였다. IMF 이전 패션계는 호황을 누렸으나 해외시장 개방과 인터넷 쇼핑 등 새로운 유통체재의 유입으로 1990년대 후반 국내 패션시장은 급변하였다. 결론적으로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이라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한국패션은 세계의 트렌드를 받아들 이며 발전하고 있었으며 1960년대 이후 정부 주도의 디자이너 지원 사업이 기획되어 성과는 미흡하나 한 국패션디자이너의 해외시장진출이 가능하였다. 노라 노는 ‘1950~1960년대 해외 패션트렌드를 한국에 유 입했다’는 점과 ‘1970~1980년대 해외시장개척의 선 봉에 섰다’는 측면에서 한국 근현대패션사에서 의의 가 있다. 본 연구는 20세기 중 · 후반 한국패션을 고찰하면 서 연구대상자 노라노의 1980년대 행적이 해외활동 에 치중되어있고 지면의 제한으로 사례연구대상이외 의 디자이너들을 심층 분석하지 못해 유형분류가 선 행연구와 사례연구분석에만 국한된 점이 연구의 한 계점으로 남으며 이에 연구자는 연구계획에서 밝힌 후속연구를 추후 진행할 것이다. 참고문헌 1) 유수경 (1989), 韓國女性洋裝의 變遷에 관한 硏究, 이 화여자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유수경 (1990). 韓國女性洋裝變遷史, 서울: 一志社. 2) 박길수, 김서현 (1999), 한국 현대복식에 나타난 일본 패션의 영향: 여대생을 중심으로, 복식문화연구, 18(3), pp. 27-37. 3) 조희진 (2002), 몸뻬를 통해 본 의생활의 전통과 외래 문화, 실천민속학연구, 4, pp. 147-165. 20세기 중·후반 한국패션 고찰  - 73 - 4) 공제욱 (2005), 일제의 의복통제와 ‘국민’ 만들기: 백의 탄압 및 국민복 장려를 중심으로, 사회와 문화, 67(6), pp. 41-83. 5) 안태윤 (2007), 일제 말 전시체제기 여성에 대한 복장 통제: 몸뻬 강제와 여셩셩 유지의 전략, 사회와 문화, 74(여름), pp. 5-33. 6) 윤주리, 홍나영 (2011). 우리나라 몸뻬에 관한 연구, 한 국복식학회 춘계학술대회포스터발표, pp. 133-135; 윤주리 (2011), 몸뻬의 보급과 확산 과정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7) 최수아 (2009), 해방이후 한국패션에 나타난 미국화·탈 미국화,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최수아(2011), 한국 복식문화의 근․현대화과정에 나타 난 미국화의 특성, 복식, 61(3), pp. 1-19. 8) 고부자 (2001), 우리생활100년 · 옷, 서울: 현암사. 9) 신혜순 (2008), 한국패션100년, 서울: 미술문화. 10) 현대패션100년편찬위원회 (2002), 현대패션100년: 1900- 2000, 파주: 교문사. 11) 이재정, 박신미 (2011), 패션, 문화를 말하다: 패션으 로 20세기 문화읽기, 서울: 예경. 12) 방기완 (1962, 8. 10), 意慾的인 服飾디자이너 崔敬子 (의욕적인 복식디자이너 최경자), 여원, pp. 174-176. 13) 이정우 (2002), 한국패션의 태두 최 경자 선생, 공예 와 문화, 통권 2호(봄), pp. 6-19. 14) 노라노 (1973), “의상야화”, 한국일보, 연재 12회. 15) 노라노 (2007), “남기고 싶은 이야기 ‘나의 선택, 나의 패션”, 중앙일보, 연재 4개월. 16) 노라노 (2007), 노라노, 열정을 디자인하다, 서울: 황 금나침판. 17) 노라노 (2012. 5. 23-6. 2), 노라노 60주년 회고전 ≪La Vie en Rose 展≫, 호림미술관 JNB Gallery, 서울; 조덕현 (2008. 05.30-07.05), ≪re-collection≫전, 조덕 현작가 전시모델, 국제갤러리, 서울: 경기여자고등학 교 100주년 기념전 ≪한국패션100년전≫(2008. 10. 15-12. 9), 서울: 경운박물관. 18) “패션계의 신화, 디자이너 노라노” (2007. 10. 24.), <김미화의 U> 367회, SBS TV; “한국패션의 전설 노라노” (2012. 05. 22), <이슈 앤 피플>, YTN뉴스: ‘한국패션의 뿌리 노라노, (2012. 5. 26), <이슈 인 스토리>, MBC뉴스. 19) “노라노가 말하는 파리의 유행” (1971. 2. 26), 중앙일 보, 1회; “The real thing” (1973), Woman's Wear Daily: (1973. 8. 6), New York Times; Patricia Shelton (1974. 10. 31), Chicago Daily News: (1984. 05). Vogue 미국판 광고: (1986) Harper's Bazaar 미국판 광고; “나의 일, 나의 삶” (1990), 여성저널, 한국일보사; 유인경 (1999. 9. 6), “고급 옷 거품 빼는 한국의 사 넬”, <이사람이야기>, 경향신문; “노라의 선택” (2002), 바자 한국판: “노라는 누구” (2003), 월간조선, 조선일보사; 유인경 (2006. 12. 7). “디자이너 노라노 선생” <유인 경이 만난 사람>, 주간경향, 경향신문사; 김현수 (2012. 5. 11). “한국 첫 양장디자이너 노라 노”, 동아일보; 김문 (2012. 5. 12). “패션인생 70년 전 여는 디자이너 노라노”, <김문이 만난 사람>, 서울신문; 김윤덕 (2012. 5. 26.), “대한민국 1호 패션디자이너 ‘노라노’, 노명자”, , 조선일보; “Chic to Bones” (2012. 6), 보그 한국판; <“The Moment of Nora Noh” (2012. 6), 바자 한국판; “노라노 그녀의 뜨거운 인생” (2012. 6), 마리클레르 한국판; “The Legend of Nora” (2012. 6), 엘르 한국판; “Nora's House” (2012. 6), 보그 걸; “대한민국 1호 패션디자이너 노라노 패션인생 60년” (2012. 6), 우먼센스; “한국 최초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 (2012. 7), FASHIONGIO. 20) “KBS 한국 현대사 증언” (2012. 5. 6, 13), , 65회(2012. 5 06), 66회(2012. 5. 13): 김성희 (2013), “노라노”, 연분홍치마, 독립다큐멘터리 영화. 21) 한수연 (2012), 한국 패션에 나타난 미국화에 관한 연 구 -1950년대~1980년대 노라노 패션을 중심으로-, 한 국의상디자인학회지, 14(3), pp. 195-204; 한수연 (2012), 패션 커뮤니케이션 매체로서의 패션 전시에 관한 연구: 2012 노라노 <라 비 엥 로즈> 전시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의류학회지, 36(9), pp. 966-978. 22) 연구면담에는 다큐멘터리 ‘노라노(2013)’ 감독 김성희 의 면담이 포함됨. 23) 원어표현: あっぱっぱ/アッパッパ. 24) 이재정, 박신미, op. cit., p. 152. 25) Ibid., pp. 99, 121. 26) 신혜순 (2008), op. cit., pp. 36-37. 27) 유수경, op. cit., p. 253. 28) Ibid., pp. 269-270, 275; 이재정, 박신미, op. cit., pp. 152-153. 29) 배천범 (2002), “1940년대”, p. 170 in 현대패션100년 편찬위원회, op. cit., pp. 141-170. 30) 고부자, op. cit., p. 230: 신혜순 (2002), “1950년대”, pp. 189-190 in 현대패션100년편찬위원회, op. cit., pp. 171-207; 이재정, 박신미, op. cit., p. 180. 31) 신혜순 (2002), op. cit., p. 207. 32) 박민여 (2002), “1960년대”, p. 227, in 현대패션100년 편찬위원회, op. cit., pp. 209-234. 33) 유수경, op. cit., p. 284. 34) Ibid. 35) 신혜순 (2002), op. cit., p. 195. 36) Ibid., pp. 46-47. 37) 고부자, Ibid., p. 14. 38) 이재정, 박신미, op. cit., p. 212; 신혜순 (2008), op. cit., p. 60. 39) Ibid., p. 213. 40) 의상계 (1968 가을호) 창간호 표지. 41) 이재정, 박신미, op. cit., p. 247 42) 고부자, op. cit., p. 256. 服飾 第64卷 4號  - 74 - 43) 이재정, 박신미, op. cit., p. 249. 44) 김진식 (1990), 한국양복100년사, 서울: 미리내, p. 269. 45) 신혜순 (2008), op. cit., p. 80. 46) 김영인 (2002), “1980년대 패션", p. 279. in 현대패션 100년 편찬위원회, op. cit., pp. 267-290. 47) 이재정, 박신미, op. cit., p. 288. 48) Ibid., p. 287. 49) 김윤희 (2000). 1990년대 패션’, p. 308. in 현대패션 100년 편찬위원회, op. cit., pp. 291-322. 50) 당시 기술대학에서는 미국식 평면패턴과 프랑스식 입 재재단 그리고 패션사를 가르쳤으며 패션일러스트레 이션 과목은 없었다. 제2차 채록면담(2012. 9. 5). 51) Ibid. 52) 2012년 7월 자료수집과정에서 예림양행자료에는 최초 의 노라노 <기성복 패션쇼>는 1964년 화신백화점 주 최 패션쇼로 기록되어있었으나 노라노는 1966년으로 기억했다. 하지만 노라노와의 면담과 소장 자료 추가 분석으로 최초의 디자이너 기성복패션쇼는 1963년 미 우만 백화점 패션쇼임을 본 연구에서 밝혀냄. 미우만백화점: 1959년 12월 20일 문을 연 정진욱이 만든 백화점. “치솟는 眼下無人: (7) 時代百貨店" (1968. 11. 22), 매일경제. 53) 이성희 (1998. 2. 4), “할인점 전용브랜드 인기”, 한국 일보. 54) 2012년 7월 10일부터 9월 26일까지 노라노 구술채록 을 통해 수집된 자료를 정리한 것임. 55) 부산에서의 활동시기를 노라노는 ‘전쟁 중’으로만 기 억하고 있으며 제시된 활동년도(1951-1952)는 2012년 9월 5일 2차 채록 면담 후 추가면담을 통해 추정된 활동시기임을 밝혀둔다. 56) 신협(新協): 1950년 1월에 국립극장의 전속극단으로 결성된 단체로서, 현존하는 극단 중 가장 오래된 것이 다. 발족 당시의 중심인물은 이해랑(李海浪), 김동원 (金東園), 주선태(朱善泰), 오사랑(吳史良), 유계선(劉 桂仙), 황정순(黃貞順) 등이며, 이들은 원래 1947년에 발족한 극협(劇協)의 회원들이었는데 국립극장이 설 립되면서 협의기구인 신극협의회로 흡수되었다가 전 속극단인 신협으로 발족했다. 두산백과사전, “신협”, 자료검색일 2012. 7. 20. http://www.doopedia.co.kr/d 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 DX=101013000849851 57) 한동인(韓東人, 미상): 1946년 한국인으로 구성된 최 초의 발레단인 ‘서울발레단’을 창단했다. 58) 임춘앵(林春鶯, 1923~1975): 15살에 광주국악원에서 창무를 배웠고 1948년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하여 여 성으로 이루어진 여성국극체제를 정립했다. <춘향전> 을 창극으로 공연했고 당시 이도령역을 맡았으며 이 후 ‘남장연기의 1인자’로 불렸다. 박황 (1976), 창극사 연구, 서울: 백녹출판사; 이원기 (1961), 국악예술인명감, 서울: 국악계사. 59) 노라노의 자서전과 기존의 저작물에 <키스 오브 파이 어 드레스>는 1954년 작으로 표기되었으나 2012년 9 월 5일 면담에서 노라노는 해당 작품이 환도(1953)전 인 1952년 미8군 가수 유정희를 위한 무대의상 작품 이 확실하다고함. 60) 썬드레스(sundress): 팔과 어깨를 드러낸 여름용 드레 스를 말함. <그림 2> 오른쪽에서 두 번째 박혜옥의 의 상 참고. 61) 오른쪽부터 박단마, 박혜옥. 유정희, 왼쪽에서 4번째 노라노, 왼쪽 끝 유부영, 나머지 가수는 노라노가 기 억 못함. 62) 칼리지패션(College fashion)은 대학생들의 패션스타 일만이 아닌 고등학교이상의 학생복스타일로 기성세 대의 스타일과 다르게 학생의 신분에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멋을 낸 패션스타일을 말한다. 1950년대부터 유행했으며 남성복의 ‘아이비 룩(IVY look)’ 여성복 의 ‘블레이저(blazer)에 플리츠스커트(pleats skirt) 혹 은 타탄체크스커트(tartan check skirt)’착장이 이 스 타일을 대표한다. 이것은 유스패션(Youth)의 또 다른 형식이다. 63) Francois Baudot (1999), A Century of Fashion, London: Thames & Hudson, p. 141. 64) 1956년 11월 29일 2시 반도호텔 그랜드 볼륨. 65) 방모사(紡毛絲)라고 부른다. 모사(毛絲)의 일종(一種) 으로 방모사 방적법(紡毛絲紡績法)으로 만든 실이다. 링(ring)사와 뮬(mule)사의 2종류가 있으며 굵기가 균일하지 않고 꼬임이 약간 느슨하다. 외관은 조잡하 고 둔탁한 느낌이나 부드럽고 보온성이 풍부한 원단 으로 생산된다. 복식대사전 (2000), p. 425. 66) 1958년 11월 11일 오후 3시 30분 반도호텔, <노-라·노 팻션쇼> 초대장. 67) 1962년 3월 31일 오후 2시 그랜드호텔, <노-라·노 횃 션쇼> 초대장. 68) 우리 한복감인 ‘갑사’와 ‘양단’을 사용해 노라노가 1950 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중반까지 한복을 모티브로 디자인한 파티용드레스를 말한다. 이후 한복을 모티브 로 한 디자인들은 ‘아리랑드레스’로 명명되었다. 69) 노라노는 “사발비행기 시대에는 2년에 1번, 1960년대 이후는 1년에 1번 파리, 뉴욕, 로마를 방문했고 주로 현지에서 잡지 구독을 신청하여 해외트렌드 정보를 입수하였다.”고 답변함. 2012년 12 월 22일 추가면담 시 “해외트렌드 입수경로와 디자인 영감 출처”에 관한 질문의 답변. 70) 최은희를 위한 <꿈> 의상은 중국복식을 차용해 디자 인되었다. 71) 서울 미아리지역에서 생산된 수자직 실크를 말함. 72) 1969년 6월 18일 오후 3시 극동호텔 <자선패션쇼>. 목 화아가씨 패션쇼 초대장: 목화아가씨패션쇼는 YMCA 와 대한방직협회와 함께 기획한 패션쇼로 수익금의 일부가 YMCA 건물증축에 기부되었다. 2012년 09월 19일 면담에서 노라노는 1969년과 1970년 2차례 개최 되었다고 기억하였으나 신문자료 확인결과 1969년과 1971년에 개최된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패션쇼의 취 지는 우리면의 우수성을 알리는 동시에 한국패션모델 은 선발하는 것인데 1969년 이희재, 변자영이 선발되 었으며 이들이 한국여자패션모델 제1세대이다. 73) 노라노의 이전 기록물들에는(예: 자서전 및 인터뷰) 노라노가 1971년부터 1973년까지 Paris Pret-a-Porter 20세기 중·후반 한국패션 고찰  - 75 - 패션쇼에 참석한 것으로 기록되어있으나 파리의상조 합에 기성복조합이 포함된 것은 1973년이므로 이는 논리적 오류가 있다. 실증자료로 확인 된 것은 노라 노가 1973년은 코트라(KOTRA)의 지원으로 <파리 프레타 포르테 박람회>전시에 참석한 것이며, 2012년 10월 19일 노라노와 면담결과 1971년~1973년까지 코 트라의 지원으로 <기성복 판매를 위한 부스전시회>에 참석한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2013년 01월 30일 연구자가 당시 중앙일보와 동아일보 신문기사를 분석 한 결과 해당 박람회가 1972년 F/W~1973년 F/W까 지 3차례 지원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74) 가운데 여성이 노라노. 75) 당시 제품제작을 위한 기술자들은 50~60여명이었으 며 1988년 올림픽이후 인건비상승으로 공장을 패업할 때까지 이들이 가장 많이 생산한 수출품 생산량은 1 년에 5만 벌이었다. 2012년 9월 19일 채록 면담. 76) 연구대상자는 미국법인 세분화를 잊고 있었으나 2012 년 09월 19일 채록 면담에서 연구자가 노라노의 소장 자료 중 미국시절 리플렛에 기재된 브랜드 이름과 법 인명을 찾아내 노라노가 1979년 설립이후 지역의 특성에 맞게 1983년 중 반까지 실크제품을 주로 판매하는 를 단독 운용하였고, 1983년 저가라인인 를 론칭해 브랜드를 세분화 한 것을 본 연구에 서 밝혀냄. 77) 연구자는 2번의 면담을 통해 노라노의 1980년대 제품 번호 표기방법을 추출했다. 2012년 09월 19일 면담에 서 연구대상자가 언급한 히트상품의 제품코드가 <5175>이었는데 자료정리 중 동일디자인의 드로잉에 는 <9175>로 스타일번호가 기재된 것을 발견했다. 이 에 2012년 12월 05일 추가면담 시 연구대상자의 기억 을 유도했고, 그 결과 스타일번호의 첫 숫자는 제작연 도로 <5175>, <6175>, <7175>, <8175>, <9175>가 모두 5년 동안 계속 생산되어 판매된 동일 디자인임을 밝 혀냈다. 노라노의 공장직원은 해당디자인을 모두 <5075>로 기억하는데 그 이유는 두 번째 숫자가 프린 트패턴의 종류를 말하는 것으로 ‘0’은 프린트 패턴이 없는 솔리드라인 디자인을 ‘1’은 프린트 패턴이 있는 디자인의 종류를 지칭하는 것이어서 이들은 원단의 종류가 아닌 기본 디자인을 제품번호를 기억해 해당 디자인을 <5075>로 인식했다. 78) 이성희 (1998. 2. 4), op. cit.. 79) 시대별 대표디자이너 구분은 역사적 전환점 그리고 디자이너가 가장 활발히 활동한 시점을 기준으로 분 류했으므로 선정결과가 하우스 오픈 시기와는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밝혀 둔다. 그러므로 이미 언급된 디 자이너가 다음 시대에 지속적으로 활동하더라도 차 하위년도에는 기재대상에서 제외시켰다. 디자이너의 구분은 명확한 기준 아래 추후 추가연구가 필요함을 밝혀둔다.